[성서의 세계 - 구약] 예레미야 : 심판의 나팔 소리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들에게 참회를 촉구하는 열정적인 설교자였다.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동포들의 죄상을 밝혀 내는 통렬한 고발자였다. 그의 생애 또한 구약 성서 안에서 수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그려 주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첫째 부분은 예언자의 시와 연설들을 담고 있다(1-25장). 둘째 부분은 예레미야의 서사 바룩이 쓴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로서, 저 유명한 성전 연설(기원전 609년) 시대부터 에집트 귀양살이에 이르기까지 예레미야 예언자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26-45장). 셋째 부분은 외국 민족들에 대한 예언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46-51장). 52장은 일종의 역사적인 부록으로서 열왕기 하권 25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예레미야서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보속 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면면에 넘쳐 흐르는 슬픔과 비탄이 읽는 사람을 침울하게 만든다. 예레미야서 자체가 그 책이 쓰여지던 시대처럼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사람을 혼동하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를 쉽게 이해하려면 열왕기 하권 21-25장을 먼저 읽어 두는 것이 좋다. 거기에 예레미야 예언서의 역사적인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북부 왕국 사마리아(이스라엘)가 아시리아 제국에 합병된 후 남부 왕국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그때 아시리아인들의 종교 봉행이 공식적으로 권장되었다. 하지만 아시리아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침략자들이 밀려드는 틈에, 거룩한 왕 요시아는 잠시나마 독립의 기회를 얻어 국민 생활을 일신하고자 신명기의 노선에 따라 종교 개혁을 시도한다. 요시아는 에집트인들과 싸우다 죽고, 세계 지배를 꿈꾸는 갈대아인들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북쪽을 그리고 에집트가 남쪽을 지배한다. 유다는 이제 바빌론 왕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아가 아직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을 때인 기원전 627년에 예언 직무에 대한 소명을 받는다. 그때 그는 나이 스무 살의 청년으로서 베냐민 지방 아나돗에 사는 한 사제의 아들이었다(1,1). 그 예언 역정의 첫번째 시기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자 하였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변절을 고발하기 시작하며,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2,1-4,4). 그의 호소가 묵살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북쪽의 적군들을 통하여 징벌이 내릴 것이라고 백성들을 위협하였다(4,5-6. 30). 요시아가 종교 개혁 과정에서 지방의 산당들을 폐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민족의 예배를 집중시킬 때에, 예레미야는 아나돗을 떠나 수도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위로부터 강요되는 요시아의 개혁이 백성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8,8). 요시아가 죽은 다음 여호야킴의 통치 초기에 예레미야는 그 사명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그는 백성들에게 외적인 제도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저 유명한 “성전 연설”(7장; 26장)에서 그는 성전을 안녕의 상징으로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성전은 파괴되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할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수세기가 지난 후 예수께서도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실 수밖에 없었다(마르 14,58). 예레미야는 “옹기장이집의 설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녹로를 돌리며 일하는 옹기장이를 보았다.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내다가 제대로 안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그때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이 옹기장이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18,6). 성전뿐 아니라 온 나라의 완전한 파괴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그는 장로들과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오지그릇 하나를 팽개쳐 부수며 말하였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19,11). 이제부터 예레미야가 갈 길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다의 죄는 정으로 새겨져 있다. 뾰족한 차돌로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17,1)고 확신한 그는 하느님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선포하였다. “나는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이 도읍은 바빌론 왕의 수중에 들어가서 불에 타 없어지고 말리라”(21,10). 예레미야 자신도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이 너무나 힘겨워 극심한 고뇌에 빠져들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20,14. 18; 6,19-20 참조). 예언자의 내적 고통은 원수들의 박해를 통하여 더욱 더 깊어져 갔다. 여호야킴 왕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불살라 버렸다. 예언자와 그 서사 바룩은 몸을 숨겨야만 했다(36장).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든 여호야킴은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였고(22,13-19), 그 후계자 여호야긴도 양민들과 더불어 바빌론으로 추방당하였다(13,18-19,24).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25,12; 29,10)에 따라 칠십 년 동안 지속될 바빌론 포로생활의 시작이었다(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사악한 사람으로서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민족의 영광을 외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넘어가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었다(21장; 23,9-40).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기원전 588년 갈대아인들에게 포위를 당한다. 이 두번째 포위에 관한 기록은 21장과 32-34장, 37-38장에 들어 있다. 예레미야의 투쟁은 이때 그 극에 달한다. 그는 거듭 항복을 권유하다가 패배주의자로 몰려 웅덩이에 처박히고 말지만, 에디오피아인 내시에게 구출된다. 기원전 586년 7월, 마침내 도성은 함락되고, 왕은 붙잡혀 눈알이 뽑힌다. 온 성읍과 성전이 불에 타 무너진다(39장). 그러나 예레미야는 정복자들에게 존경을 받아 아무데나 갈 수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옹기그릇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제 새날이 동터 오는 것 같았다. 예레미야와 친분이 두터운 게달리야가 유다 총독이 되었다. 30장과 31장, 39-44장이 이 기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가운데 이 대목이 가장 아름답고도 위로가 넘치는 예언들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는 새로운 계약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폐허의 도성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길고 긴 난민의 대열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외쳤다. “칼부림에서 빠져 나온 백성이 사막에서 나의 은혜를 입었다. 안식처를 찾아 나선 이스라엘에게 나 야훼는 멀리서 나타나 주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워 주리라”(31,2-4). 피난민의 무리가 비탄 속에 모여 사는 라마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거두어라. 밝은 앞날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31,16-17). 그 다음 구원 역사의 이정표가 될 새로운 계약에 대한 장엄한 선포가 뒤따른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 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라”(31,31-34). 예레미야의 역정에서 절정이라 할 이 예언은 그의 생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달리야는 과격 분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40-41장). 느부갓네살의 진노가 두려워, 그 가련한 잔류민들은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42장) 에집트로 도망을 친다. 예언자는 열정에 넘치는 최후의 호소로 “하늘의 여왕”에게 제주 바치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44장). 예레미야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백성들의 신앙은 지상의 복락만을 찾는 “기복 신앙”이었다. 예레미야의 잔은 이제 가득 찼다. 믿을만한 전설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들이 돌로 쳐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굴의 증인 곧 진정한 순교자의 죽음이었다. 얼마 가지 못하여 예레미야의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진다. 에집트가 느부갓네살의 수중에 떨어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부질없이 대들었던 유다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은 처참한 비극으로 그 종말을 고하고 만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마태 23,37-38).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가?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공동체의 예속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사람이며, 자신의 내밀한 종교적 감정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던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생명이 없는 의식(儀式)의 횡포로부터 정신의 자유를 찾고자 싸웠던 위대한 투사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우리 현대인들 가운데 살아가는 위대한 진보적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하느님의 말씀은 그를 압도하는 유일한 열정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고, 야곱은 축복을, 모세는 지팡이를, 다윗은 도유를 받았다. 이사야는 불덩이로 입술을 정화시켰고, 에제키엘은 두루마리를 삼켰었다. 주님께서는 손을 뻗쳐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르셨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1,9-10). 이는 바로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레미야를 붙잡으신 분은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셨다. 예언자의 마음과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심오하고도 내밀한 일치를 이루었던 예언자는 없었다. 말씀은 그의 힘이었고 또 그의 십자가였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단순한 꿈이나 염원을 결코 하느님의 말씀과 혼동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위를 부수는 망치”(23,29)와 같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심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죄상 곧 변절과 허영을 가차없이 비난하였다. 그의 말은 회개와 참회를 촉구하는 심판의 나팔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고난받는 종,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6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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