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아담에게 짝을 만들어 주신 뜻은 지상 낙원을 거닐음 창세기에 대한 예전의 해설을 따르면 낙원에 나 있는 길을 다소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동쪽에 입구가 하나 있었고, 아담이 죄를 지은 뒤에 거룹 하나가 거기서 보초를 섰다. 어떤 해석자들은 낙원을 가로지르는 강은 네 줄기였다고 하는 반면에 다른 해석자들은 강은 오직 낙원 밖에서 갈라졌다고 한다. 중앙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가면 낙원 한가운데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 나무도 틀림없이 낙원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 나무는 많은 민간 해설에서 거의 잊혀져 왔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에 관해 잠시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낙원을 묘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산 한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 나게 하셨다”(창세 2,9). 하느님의 금지령은 단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만 해당되었고, 낙원에 있는 다른 나무의 열매는 무엇이든 사람이 먹어도 되었으므로(창세 2,16) 생명 나무에 접근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뒤에 타락한 사람이 이 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동산의 동편에 보초 하나를 세워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염려는 무엇보다도 생명 나무에 있었다. “이제 이 사람(아담)이 ……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되겠다”(창세3,22).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을 내쫓고 이 신비스러운 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돌아가는 불칼을 든 거룹 하나를 즐거운 낙원의 수직꾼으로 세우셨다(창세 3,24). 어떻게 이 나무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 이름을 고려해 볼 때, 생명 나무는 특별한 방식으로 생명을 주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심려에 대한 묘사에 비추어 볼 때 타락한 사람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모든 것을 자의(字義)대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심각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낙원에 있는 네 줄기의 강 - 이 가운데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있다 - 이 하나의 원천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낙원을 지리학적으로 배치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낙원 동쪽에 있는 수직꾼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 나무를 지켜야만 했던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보다 널리 알려진 어려움은 이러하다. 모든 인류를 불행에 떨어지게 한 죄가 다름 아니라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일이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모든 질문은 문자적인 설명에 대해 수정을 요한다. 협의의 역사 편찬처럼, 모든 것을 아주 상세한 데까지 고려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창조의 장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도 성서 저자는 특별한 양식을 사용함으로써 극히 원시적인 그의 독자들의 정신에 근본적이고 위대한 진리를 새겨 주고자 했다. 즉 그는 회화적인 수법으로 첫 사람의 조건을 설명하였다. 낙원의 전반적인 상황이 무엇보다도 인간 마음의 복된 상태를 지적하듯이, 낙원을 묘사하는 다른 요소들도 인간의 내적 상황에 대한 이미지라고 하는 편이 낫다. 생명나무로 저자가 뜻하고자 한 것은 사람이 불멸성을 소유했다는 점이다. 타락 이후 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거룹은 사람이 자신의 불멸성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없다. 이러한 전망에서 네 줄기의 강은 거의 무한한 행복의 조건을 가리킨다. 낙원의 물 - 즉 비옥함과 풍요함 - 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를 포함하는 세계의 네 줄기 강물을 이룰 만큼 풍족했다. 그리고 모든 묘사 가운데 유일하게 어두운 요소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행복이 아직 불안정했고 영원히 주어지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행복은 하나의 계명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었다. 그것으로써 낙원에서의 인간의 조건은 시련의 때였으며 이 시련에 인간이 떨어졌음을 드러낸다.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온 하와 지상 낙원에 관한 이야기(창세 2-3장)는 특이한 관점으로 인간의 창조를 묘사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기원이 찬양되었던 창조 이야기(창세 1장)와는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관심이 주로 첫 사람의 행복에로 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거의 배타적으로 이러한 초자연적 행복에 대한 조형적인 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대비의 효과를 가져 오는 흑백 그림을 다룬다. 이 때문에 행복은 어떤 불행을 배경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짝이 없는 남자의 고독이 돌출한다. 마지막에는 인간의 타락한 슬픔과 지상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 지배한다. 이제 비록 남자 홀로 있는 고독이 여성의 창조를 통해 종결되었지만. 그것으로 성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행복의 완성을 뜻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문서적인 해석에서는 묘사의 모든 세부 사항을 역사적으로, 완전히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와의 창조는 그러므로 창세기 2장 21-22절의 묘사대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우리가 많은 교부들과 옛 신학자들에게서 발견하는 이러한 엄밀한 문자적인 해석은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이 단언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교회 저술가들은 이런저런 세부 사항을 덜 역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비유적 혹은 상징적인 표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금세기초에 교회 당국은, 성서위원회의 입을 빌어, 성서를 주석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현대적인 이론에 주의할 것을 권고했을 때 하와의 창조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를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즉 “첫 번째 사람에게서 지음 받은 첫 번째 여인.” 갈빗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성서조차 갈빗대에 대해서 그렇게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성서 저자가 사용한 히브리어 단어는 갈빗대 외에 측면, 원형 혹은 생명을 뜻할 수 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불확정적인 즉 용어의 뜻은 우리에게 보다 자유로운 설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어떤 해석학자들은 용어의 이러한 불확정적인 의미 혹은 실재에 근거하여 하나의 해결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단지 하나의 단어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해결을 찾는 것이 현대 해석의 방향과 보다 일치한다. 거기서 행의 지침 즉 하나의 결정적인 성서 인용구(pericope)의 문학 유형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하와의 창조에 있어서는 아담의 잠으로 시작한다. 하느님의 개입에 대한 묘사는 몹시 간결하다. 성서 저자는 아담이 하와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는 단어에 보다 중점을 둔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24). 성서 저지는 두 성(性)이 만나는 사실에 있어서 모든 세부 사항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리하여”라는 말로 자신의 의향을 추측케 한다. 우리 역시 우리의 언어에서 이유에 대한 탐구에 뒤따라오는 이른바 결론적인 접속사의 힘을 알고 있다. 그 탐구가 엄밀히 철학적이거나 역사적일 때 “이리하여”는 철학적 혹은 역사적인 하나의 동기를 제공한다. 반면에 그 탐구가 우연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시적일 때는 거기서 철학적 혹은 역사적 동기를 인지할 필요가 없다. 학교에서 “어째서 방울새는 가슴 깃털에 자그마한 붉은 점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답변할 필요가 있을 때 선생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기기 위하여 참고 견딘 작은 새의 노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가시가 작은 새의 가슴을 찔렀는지 그리고 어째서 깃털이 피에 물들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동정에 상을 내리시고자 하셨다. “이리하여” 이 작은 새의 모든 후손은 가슴에 붉은 점을 갖고 있다. 조금 큰 아이들조차 전혀 믿지 않듯이, 선생님 자신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화는 누구나, 어른들까지도, 이 붉은 가슴의 이유에 대하여 숙고해 보도록 한다. 나아가 이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단순한 수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비록 꾸며낸 것이기는 해도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어쨌든 창조 이야기의 진술자가 여인과 관련된 구절에서 하나의 ‘어째서’에 그러한 방식으로 대답하고자 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창세기 2장 24절의 “이리하여”는 그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러한 경우, 성서 저자는 하나의 역사적 동기를 제시할 마음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두 성의 기적에 대해서 주의를 끌고자 하였던 듯싶다.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치에의 원의를 어떤 의미에서 원초적인 결합에로 끌어올렸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 원의를 결국은 참된 동기라 할 원인 즉 하느님의 창조 의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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