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만나, 하늘에서 떨어진 빵일까 홍해를 건너감 “십계”라는 웅장한 영화를 보면 이스라엘인들의 통로가 홍해의 물결을 가르고 마치 등나무 숲 사이에 나 있는 대로처럼 뚫려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역사적인 통과를 마치 출애굽기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14,21-22). 바람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의 표면은 상당한 시간 동안 갈라져 있어야 했다. 물은 그 본질상 다시 합치려 했으나 계속 불어댄 바람에 끊임없이 격퇴되었다. 그래서 물은 점점 높이 솟아올라 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고 덧붙이고 있는 성서의 말은 우리의 상상이 그려내는 것과 같은 곧게 선 벽을 가리키지 않는다. 단지 물의 경계가 아주 또렷하게 돌벽처럼 견고한 듯이 보였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바람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독자는 하느님께서 자연을 이용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그분은, 우리의 상상이 그려내는 강풍의 도움 없이도 물을 갈라놓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그것은 분명히 기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성서 구절에 의하면, 단지 바람이 일어나고 멈춘 일만이 기적적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적절한 동풍이 부는 바로 그 순간에 전적으로 기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순간은 모세가 뻗친 손과 연결된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마술적인 능력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행사되었다는 것은 즉시 이어지는 다음의 사실에 의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결이 도로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 버렸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에 들어섰던 과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출애 14,28). 대부분의 에집트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홍해 통과에서 단지 일부분만 기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 현상을 이용하신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께서 당신께 대한 신뢰를 키워 주기 위하여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을 인도하시고 동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에집트인들을 거슬러서 야훼에 의해 전개되는 권능을 보고 “야훼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출애 14,31). 하늘의 빵 네 번째 복음서는 기적적으로 빵을 많게 하신 일을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의 기적과 분명하게 관련짓고 있다. 두 사건은 놀라운 연관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굶주린 백성이 광야에까지 그들의 지도자를 따라가 거기서 기적적으로 배를 불렸다는 점이다. 제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담화는 빵을 많게 한 두 가지 기적을 최후 만찬에서의 빵의 기적과 일치시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 이러한 표현에 의하여 이 긴밀한 연결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서적인 사건들 - 처음에는 광야에서의 만나, 그리고는 예수님에 의해 쪼개진 빵, 마지막으로 오늘날도 매일같이 쪼개지는 성찬의 빵 - 의 전망을 총체적으로 알게 해주기에 다행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체성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을 얻게 되는 이점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광야의 만나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소홀함이 있다. 다시 말해 만나를 시편 작가의 말대로, 천사들의 빵처럼 곧바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빵으로 상상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하늘의 구름에게 명하시어 하늘의 문들을 열게 하시고 그들이 먹을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내리시어 천사들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먹이셨으니 그들이 배불리 먹을 식량을 내려주셨다”(시편 78,23-25). 이것은 이례적인 기적으로서, 예수의 손에서 빵이 많아진 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례적인 기적은 미사 성제로 점차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기원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성서를 읽어 보면 기적은 이러한 이례적인 성격을 나타내지 않는다. 성서의 묘사에 의하면 만나는 빵이 아니었고 “고수씨같이”(출애 16,31) 흰 색깔의 낟알이었다. 그것은 “고수풀씨처럼 생겼고”(민수 11,7) “맛은 벌꿀 과자 같았다”(출애 16,31). 태양이 떠오르기 전인 이른 아침에 광야의 모래 위에서 “흰 서리 같은 것”(출애 16,14)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햇볕에 녹아 버렸기 때문에”(출애 16,21) 이른 아침에 거두어 들였다. 그 낟알들은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반죽하여 냄비에 구워서 빵을 만들었는데, 그 맛은 기름에 튀긴 빵맛이었다(민수 11,8 참조).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만나를 먹고 살았다고 하나(출애 16,35) 만나 반죽이 유일한 음식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필수적인 보충 양식으로서 백성을 기아의 죽음에서 구원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도 시나이 광야를 유랑하는 베두인족은 자기들의 양식으로서 “만(man)”이라는 만나를 모은다. 6월과 7월 이른 아침에 타마린드(열대산 콩과 식물) 아래에서 발견되는 만은 광야를 뒤덮는, 결정화된 낟알로 되어 있다. 그 낟알들은 햇볕에 녹는다. 그러나 수확해 일정하게 처리하면 얼마 동안은 보관할 수 있다. 그 낟알들을 두드리거나 찧으면 구울 수 있게 되는데 꿀처럼 단맛이 나고 성서의 만나와 비슷하다. 엄밀한 조사 결과 이 만나는 단순히 타마린드의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꿀벌이 밀랍을 만들어 내듯이 타마린드 잎의 아랫 부분에서 시럽과 같은 하얀 액을 내는 일종의 풀 곤충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밤 동안에 이 액체는 결정체가 되어 낟알 형태로 땅에 떨어진다. 매일 거두어 들이는 것은 소량이다. 일년을 모아도 몇 백 킬로그램밖에 안 된다. 어쩌면 초목이 아주 우거져 있었을 과거에는 수확이 보다 풍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모든 백성을 여러 해 동안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자연적인 만나를 기적적으로, 즉 예외적인 방법으로,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 그리고 연중 여러 달 동안 제공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식일을 고려하여 많은 양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연적인 일을 그러나 기적적인 방식으로 선사하셨다. 빵을 많게 하실 때 예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연적인 빵을 나누어 주셨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시나이의 만나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셨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10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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