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비적 떼의 두목이 판관이 되다 키손강의 신비 지리적으로 보면 성지는 지중해 동안(東岸)에 있는 장방형의 줄무늬, 즉 북에서 남으로 늘어져 있는 줄무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성지 동편의 천연의 국경이었던 요르단 강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또한 바다와 강 사이의 해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유명하고 비옥한 세팔라(Shefala) 평야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져 있으므로 성지의 길들은 자연히 같은 방향으로 나 있다. 이러한 형세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부득이 수세기에 걸쳐서 에집트의 군대가 북쪽으로 행진할 때 통과했던 통로였으며, 한편 에집트의 적인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론 같은 민족들도 팔레스티나의 같은 길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행군했다. 이 북-남 노선이 시작되는 곳에 뜻밖에도 크고 넓은 골짜기가 동-서 방향으로 펼쳐진다. 유명한 이즈르엘 골짜기다. 그리스가 지배한 후에는 통상적으로 에스드렐론 평야라고 불렸다. 이 평야와 평행을 이루어 마찬가지로 동-서 방향으로 놓인 카르멜(갈멜) 산맥이 있다. 한편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같은 방향으로 작은 키손강(wadi)이 흐른다. 그 강물은 에스드렐론 평야를 팔레스티나 전체에서 가장 비옥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미 고대에 이 골짜기는 성지 전체의 곡창이라 일컬어졌다. 오늘날에도 그곳에서는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밀밭을 볼 수 있다. 이 밀밭은 다만 정돈된 농장들과 두 개의 거대한 산, 즉 타볼산과 헤르몬산에 의해 끊길 뿐이다. 그리고 이 산들 위에는 나임과 엔도르의 주민들이 자리잡고 있다. 어쨌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골짜기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아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즉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주요 도로 - 군대의 유일한 통로 - 를 연결하는 요지로서, 그리고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도 대단히 중요했던 곡창지로서, 이 때문에 “에스드렐론 평야를 지배하는 자는 성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공통된 표현이었다. 논리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쉽게 이해가 가듯이, 에스드렐론 평야에서 이루어졌다. 전쟁을 치를 때 이스라엘 군대가 비유한 땅을 욕심내는 적과 마주쳤던 곳도 그곳이었고, 평화시에 황소를 몰며 밭을 갈고 곡식을 심었던 곳도 그곳이었다. 판관들 시대에 성지를 정복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유격대들은 주로 산악에서 공격을 전개한 반면에 가나안 군대는 그들의 전차와 기병대로 평야를 그들의 세력권 내에 두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바락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가 타볼산 허리에 배치된 반면에 가나안 사람들의 장군 시스라는 그 군대와 전차를 거느리고 키손강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읽게 된다. 여걸 드보라의 지휘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볼산에서 내려왔고 하늘의 도움으로 적군을 쳐부수었다. “위로 하늘에서 별들이 싸웠다. / 궤도를 돌며 시스라를 쳤다. / 키손의 물결이 앞을 막았다가 / 저들을 쓸어 갔다, 키손의 물결이. /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짓밟았다”(판관5,20-21). 이 승리에 대해 시편 저자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한다. “일찍이 미디안과 시스라를 치셨듯이 / 키손강에서 야빈을 치셨듯이 그들을 치소서. / 그들은 엔도르에서 전멸하여 / 땅바닥의 기름이 되었사옵니다”(시편 83,9-10). 사울의 치세 동안,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에 속해 있던 에스드렐론 평야를 지배하기 위하여 격렬한 전쟁을 일으켰다. 평야에 주둔하고 있던 사울은 밤중에 엔도르의 무당에게 전쟁의 결말에 대해 자문을 청하였으나, 그에게 사무엘이 나타났고, 사무엘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울의 군대는 평야에서 쫓겨나 키손강을 건너 도망갔고 남부의 산들을 떠돌게 되었다. 그 산꼭대기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은 죽음을 맞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상복을 입었다. 평야가 적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다윗의 후계자들은 이 이중의 상을 털어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끝나기 얼마 전에(기원전 609년경) 다윗의 후손인 요시아는 마찬가지로 에스드렐론 평야에 진을 쳤다. 그때 에집트의 강력한 군대가 그 평야를 가로질러 단숨에 메소포타미아에 다다르기 위해 북쪽을 향해 급히 진격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왕국이 바빌론에게 병합될 시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아왕은 쓸데없이 그 통로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와 온 이스라엘은 짓밟혔고 그 유명한 평야는 더 강력한 적의 손에 다시 떨어졌다. 그 풍요한 자원을 잃은 이스라엘은 거의 그 의미를 상실했으며, 몇 해 뒤 결정적으로 파멸했고 사슬에 묶여 유배지로 끌려갔다. 키손강은 수세기에 걸쳐셔 이스라엘의 영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고, 또한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 작은 물고랑은 그 넓은 평야를 물결치며 흘러간다. 풍요를 뿌리고 그 영광스럽고 슬픈 과거를 노래한다. 경솔한 서원 이스라엘의 판관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가나안 정복 시기가 비인간적으로 잔인했음을 보게 된다. 비록 잔인함이 모든 전쟁의 특징이라지만, 반유목민들의 전쟁은 두 배로 더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컨대 시스라 군대의 패주하는 군주, 야빈의 손님에서 살인자가 된 야엘의 행위에 대해 설명이 된다. 야엘은 시스라가 자고 있는 동안에 천막 말뚝을 땅에 꽂히도록 그의 머리에 들이박았다. 그러한 분위기는 또한 다른 판관들의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다의 행동을 이해하게 한다. 성서는 입다를 어떤 패거리의 두목으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서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복 형제들에게 추방되었다. “‘너는 바깥여자에게서 난 놈이야. 그러니 우리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수 없어.’ 그래서 입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돕이라고 하는 지방에 도망가셔 살았는데 건달들을 모아 비적 떼의 두목이 되어 있었다”(판관 11,2-3). 즉 그를 두목으로 섬긴 것은 천하고 추한 사람들이었다. 암몬 사람들과의 전쟁 때 방랑자 입다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뽑혔다. 타고난 기질과 비정한 그의 생활조건 때문에 그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두려움 없는 전사요 유능한 전략가가 되었다. 요르단강 서쪽의 국경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암몬으로부터 진격해 온 적과 맞서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로들에게 뽑힌 입다는 하느님께로부터 군대의 사령관으로 추인되었다. 성서는 이러한 승인을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느님의 영이 입다에게 내렸다. 그는 길르앗과 므나쎄 지역을 일주하고 길르앗 미스바에 있다가 다시 거기서 암몬군의 배후로 돌았다”(판관 11,29). 이렇게 하느님의 영이 어떤 정해진 사람에게 내리는 것은 예외적으로 지시하는 역할에 대한 특별한 선택과 준비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종류의 직무를 통해 이러한 지도자들을 많이 가졌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후대의 모든 왕들에게 맡겨진 것과는 별개의 역할을 맡았다. 판관들도 예언자들의 역할과는 아주 다른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 하느님의 이 영은 모세를 거쳐 그의 협력자로 선택된 칠십 인의 원로들에게 넘어갔다(민수 11,25). 사울왕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에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혔다(1사무 11,6). 그러한 영은,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넘어갔듯이(2열왕 2,15), 그 뒤 다윗에게로 넘어갔다(1사무 16,l4). 사람에게 그의 역할을 정해 준 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영이었다. 왕의 기능이 예언자의 역할과 달랐고 예언자의 직무가 판관의 직무와 전혀 달랐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의 영은 예언자를 사절이요 선포자로, 왕을 통치자로, 그리고 판관을 무적의 해방자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하도록 선택된 패거리의 두목 입다가 원시적이고 조잡한 표명에 굴복하였고, 그리 바르지 못한 경신 의식 규범을 따랐다는 데 대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실제로 전투를 개시한 바로 그 순간에 입다는 주님 앞에 이상한 서원을 하였다. “만일 하느님께서 저 암몬군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암몬군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판관 11,30-31). 적군을 패주시키고, 스무 성읍을 정복하고, 남방 국경을 저 먼 광야 지방까지 바꿔 놓은 승리자는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스바에 있는 집으로 다가간 그는 소구를 잡고 춤을 추며 나오는 외동딸과 마주치게 된다. 딸을 보자 그는 옷을 찢으며 외쳤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내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내가 입을 열어 야훼께 한 말이 있는데, 천하 없어도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데 이를 어쩐단 말이냐!’ 그러자 딸이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두고 야훼께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대로 하십시오. 야훼께서 아버지의 적수인 암몬 사람들에게 복수해 주셨는데, 저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청하였고……, 아버지는 딸을 서원한 대로 하였다”(판관 12,34-39). 몇 세기가 흘러간 뒤 하느님의 영은 이 지방의 다른 사람 곧 예언자 엘리야에게 내렸다. 그도 또한 그 열성과 말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개념과 올바른 의식(儀式)을 위해 싸웠다. 입다의 칼로 수호되었던 것, 즉 이스라엘의 순수한 일신교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l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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