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사자(使者) 복음 이야기의 목적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이전의 한때에는 어느 해석학자거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가톨릭 작가들이 썼든 비가톨릭 작가들이 썼든” 예수의 생애에 대한 훌륭하고 과학적으로 고심한 수많은 저서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라트, 라그랑즈, 르브레통, 리치오치 등의 이름은 사람이신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일련의 작품들과 그 내용에 보증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기들에서는 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33년 간에 대한 완전한 평론을 기록해 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예수의 생애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복음서에서 찾아볼 때, 이 사건들의 날짜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면 하나의 전기를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고, 게다가 그 사건들을 사실대로 이리저리 대조해 보면 정확한 날짜를 유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실제로 어느 사건을 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두는가 하면 다른 사가는 공생활 끝에 위치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첫 번째 대(大)담화를 하는 동안에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반면에, 루가에 의하면 훨씬 더 뒤에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 또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는 사건이 두 번 언급되는데, 요한은 예수의 출현 초기에 언급하고, 앞의 세 복음사가는 그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언급한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전기에서는, 두 가지 순간 가운데 선택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같은 사건을 두 번 말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세 개의 더욱 오래 된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가 시기의 지적에 있어서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들의 예수의 “생애”에서 네 번째 복음서의 노선에 따라 연표를 재구성하였다. 예컨대 첫 번째 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단 한 번, 즉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네 번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세 번 이상(네 번까지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즉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가셨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3년 간의 공생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알려져 있듯이, 이런 모든 고려와 특히 이런 모든 시간 계산은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전기 형태로 제공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복음서들이 그런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복음서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전기를 그릴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인격적인 예수의 성장이나 그 현현(願現)의 심리학적 국면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고대의 관념에 따라 하나의 전기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단지 예수에 대해 증언하고자 할 뿐이고, 따라서 독자들에게 예수에 관한 그리고 예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복음서들이 주는 증거는 첫째로 복음 사가의 개인적 시각이 아니라 첫세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시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거는 사도들의 말을 언급한다. 첫 번째 세 복음서에서는 확실히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구성과 정돈, 교의의 설명과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많은 집합점을 드러낸다. 그것은 분명히 공통된 출발점 혹은 사도들의 설교를 가정하게 한다. 전승은 항상 이러한 초기의 형태를 뒤따른다. 따라서 마르코는 베드로의 설교를 정착시켰고 루가는 바오로의 설교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 복음 사가들의 개인적인 면, 특히 요한의 개인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다면,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들을 특히 사도들이 공포한 메시지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예수의 현현을 목격한 증인들이었으며, 그분에게 매혹되었다. 그리고 부활과 오순절 이후 그들의 열정은 더 이상 억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고대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그들의 메시지를 확산시킨 전령이 되었다. 복음서들 안에 정착된 메시지가 이것이다. 복음서들에 의해 사도들의 절대적인 확신이 더욱 분명해지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경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분은 설교로 사도들을 압도하였고 갈릴래아를 발각 뒤집어 놓았다.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사자(使者)는 그분이었다. 따라서 예수 스스로가 복음을 선포한 전령이었다. 복음 사가들이 제안한 복음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기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은 특히 2장과 5장에서 복음서를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증거”(18항)라고 간주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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