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새로운 나라에 이르는 길 : 산상 설교 진복팔단 다섯 개의 담화로 이루어진 복음은 새로운 스승의 삶을 산상 담화로 시작한다. 아무 이유 없이 마태오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이 방대한 설명을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배치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 따르면, 예수의 주요 과제는 무엇보다도 가르침의 직무에 있다. 따라서 산상 설교는, 역시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모든 면에서 원칙이요 기초가 된다. 이러한 태도를 루가의 태도와 비교해 보면, 마태오가 예수의 생활에 있어서 몇 가지 일들을 그의 고유한 판단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루가에 의하면, 예수는 담화를 좀더 뒤에 선포하셨고, 그의 편집은 또한 상당히 짧다. 그리고 그는 옛것과 새것 사이에 대구(對句)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상 설교에 예외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의 생활과 가르침의 요점을 보지 않았다. 반면에 마태오는 이 담화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을 산상 설교로 요약하는 데 있어서 마태오는 다른 놀라운 요점을 앞에 배치한다. 바로 진복 팔단(마태 5,3-11)에 대한 담화이며, 진복 팔단은 동시에 본문으로서 그리고 억양으로서 이용된다. 잘 선택된 본문으로 자신의 설교를 요약하는 노련한 설교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 마태오의 편집 안에서 - 산상 담화를 진복 팔단으로 요약한다. 이 진복(참 행복)이 마태오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것은 루가에 의한(6,20-22) 같은 담화의 억양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실제로 예수는 그의 담화를 어떤 숫자의 진복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태오와는 대조적으로 단지 네 가지만을 말한다. 믿는 사람들은 보통 마태오의 진복 팔단을 알고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교리 교육을 통해 알고 있고, 젊은이들은 해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의 복음에서 그것을 듣는다. 많은 이들에게 “참 행복”이란 말이 짜증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단지 교리 교육의 길고 어려운 문답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복되다”는 말은 사람들의 귀에 상투어로 틀린다. 아마도 “축복”으로, 즉 예수의 입에서 나온 여덟 가지의 축복으로 옮기는 것이 우리 시대에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래할 축복일 뿐만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축하이며, 그것으로부터 장차의 행복이 거의 필연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루가의 보고에 의하면, 네 가지 진복은 대개 사회적 상황을 가리킨다. 즉 예수는 가난을 안고 그분 곁에 모여 있는 가난한 무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은 당신의 축복을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돌린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루가 6,20-21). 네 번째 진복에서만 그들의 정신적인 조건을 암시한다. “그대들은 복되도다, 사람들이 인자 때문에 그대들을 미워하면, 또한 그대들을 쫓아내고 모욕하며 그대들의 이름을 사악하다고 내치면”(루가 6,22). 이러한 도덕적 배경 위에서 누구나 쉽게 예수께서 하신 축복의 동기를 발견할 것이다. 반면에 마태오에게서는 도덕적인 고려가 이미 처음부터 지배적이다. 그의 소개에서는 예수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나아가 예수는 참석한 사람들을 통하여 장소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따라서 축복은 누구든 귀기울여야 할 규범이요 이상이 된다. 즉 누구든 축복에 동화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복되어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5.8.9.10). 루가 복음서를 읽고 나면 마태오에 의한 몇 가지 진복이 특별히 도덕적인 계획을 따르고 있다는 인상을 낳는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루가 6,20)은 마태오 복음에서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 된다.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가 6,21)은 마태오 복음에서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6)로 울려 퍼진다. 가난과 굶주림은 마태오 복음에서 정신적인 조건, 즉 그의 경우 새로운 나라의 정신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을 여는 조건을 가리킨다. 진복들과의 그러한 첫 번째 만남은 많은 사람들 안에 예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원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분은 비천한 사람들 혹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가? 더욱 간단한 해결은 예수께서 중도(中道)를 취하셨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말씀들은 불확정적이고 포괄적이었던 것 같다. 두 복음 사가는 따라서 어느 정도 예수의 말씀을 그들의 고유한 시각에 따라 해명하였을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폭 넓은 소개로 예수를 모든 사람들과 모든 시대를 위한 보편적인 스승으로 제시했다. 한편 그 자체로 고려되는 진복 - “그리스도교적인 역설(逆說)” - 은 정녕 충만히 납득되고 성취되는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갖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것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의 정점으로서, 그리고 “성스러운 복음적 변혁”의 탁월한 격언으로서 되풀이해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환기시킨다. 왜냐하면 “진복 팔단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기”(사목 헌장, 72항; 교회 헌장, 31. 38항 등) 때문이다. 산상 담화의 핵심 마태오 복음서에서 진복 팔단은 억양 혹은 주제가 될 수 있을 만큼 완전하게 산상 담화와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는 예수의 격언조의 경구(警句)에 몇 가지 의미 심장한 말들을 결합시켰다. 그러한 부가(附加)는 특히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3.6)에서 제시된다. 이러한 색조로 마태오는 이상(理想)의 내적인 특성, 그리스도교 생활의 정신적인 성향을 풍부하게 밝힌다. 이미 억양에 의해 이러한 생활의 내적인 쇄신은 담화 자체 각각의 요소에 특별한 빛을 뿌린다. 산상 담화는 충분히 확장되어 있으며 기다란 일련의 중점들을 언급한다. 세 개의 장을 중단 없이 읽으면 매우 빨리 결말에 이른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산상 담화를 복음 전체 혹은 예수의 다른 말씀들과 비교해 보면, 이 세 개의 장이 연장(延長)을 통해서도 내용을 통해서도 그 중대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블록을 이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짤막한 개론으로 하나하나 보여 주기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제기되는 질문들이 많다. 따라서 우리는 각 부분에서 지배적이고 각각의 단락들을 요약하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보기로 하자. 흔히 해석학자들은 산상 담화에서 도입(마태 5,13-16)과 에필로그(마태 7,24-29)로 둘러싸여 있는 세 부분을 구분한다. 첫 번째 부분은 새것과 옛것, 즉 예수에 의해 완성된 법과 모세의 법 사이의 일련의 반명제를 담고 있다(마태 5,17-47). 두 번째 부분에서는 올바르고 순수한 태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순전히 인간적인 의도에 대한 비난이 지속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효과적인 행동 양식을 위한 강력한 권고를 담고 있다(마태 7,1-23). 각각의 모든 부분에서 - 때로는 후렴으로, 때로는 변화로 이루어진 예들을 통하여 - 다음과 같은 중대한 원칙이 솟아 나온다. 즉 모든 것이 참된 정신, 올바른 뜻으로 이루어지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분명하게 이것은 첫 번째 부분에서 드러난다. 어떠한 규정도 바뀌지 않으나 새로운 실천이 요청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는 시나이 시대의 옛 계명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규정이었으나 단지 외적인 규범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예수는 거기에다 유다적인 설명을 하신다. 즉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 달리 말해서, 유다인들에 의하면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율법의 글자는, 역시 극단적으로 추구될 수도 있으므로 행동을 위한 유일한 규범이다. 반면에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규범을 주는 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요청하신 것은 이 규범이다. 율법의 다른 점은 “간음하지 못한다.”(출애 20,l4)고 규정하고, 이 계명에 있어서도 단지 외적인 것만이 처벌받는다. 그러나 예수는 규범을 내부로 옮기고 “마음으로의 간음”(마태 5,28)에 대해서 말한다. 따라서 옛 규범은 더욱 심오해짐으로써, 즉 인간의 내면에 이르러서 새로운 것이 된다. 두 번째 부분은 전혀 다르게 내적인 쇄신을 조명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율법 덕분에 기도, 단식, 자선 등과 같이 좋은 일을 실천에 옮길 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규범들은 행동의 외적인 국면만을 고려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나 보이려고”(마태 6,5)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자선을 아끼지 않았으나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위하여 회당이나 거리에서 나팔을 불어댔다(마태 6,2). 내적인 것은 주목되지 않았고 선한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 방식을 거슬러서 예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 필요가 없다는 비유를 제기한다. 즉 좋은 일은 숨겨져야 하고 인간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돌려져야 한다. 한마디로 새로운 가르침은 영과 마음의 쇄신을 요구한다. 비록 세 번째 부분이 앞의 두 부분처럼 통일된 하나의 블록을 이루지 않고 대체로 흐트러지거나 조리가 안 맞는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할지라도, 그 부분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것이 있다. 바로 행동의 요소다. 앞의 두 부분은 어쩌면 외적인 행동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세 번째 부분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규범이 표현된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좋은 업적은 항상 요청된다. 그 가치가 옛 규범과는 다른 규범에 따라 평가될 뿐이다. 업적에 대한 요청은 예수의 기념할만한 경구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위해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다”(마태 7,12). 기원전 20년에 랍비 힐렐(Hillel)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을 부정적인 모양으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너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이러한 부정적인 규범과는 반대로 새로운 가르침은 행동의 긍정적인 요청을 제시한다. 따라서 산상 담화의 핵심은 바로 행동이다. 그러나 새로운 규정에 따른 행동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나라”에 관한 복음서의 본문을 읽을 때 어떤 사람은, 이 이름 때문에 “지상적인 지배”와 동일한 뜻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몇몇 제국을 알고 있고, 그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면적을 알려 주는 지리학적 특성을 필요로 한다. 로마 제국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영국까지, 북부 아프리카에서 독일의 산림 지대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간적인 표현은 “나라”의 복음적 개념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에는 복음서가 뜻하는 것처럼 나라의 개념을 주는 표현들도 있다. 즉 때때로 “나라”라는 말은 권력을 표명하거나, 통치의 결정적인 형태 혹은 사회 생활의 모델을 생각하게 한다. 예컨대 ‘히틀러의 대국”은 오히려 지상적인 지배의 폭력과 공포를 뜻한다. “소련” 혹은 “미합중국” 같은 이름들은 주로 “국가’의 개념 혹은 생활의 양식도 지적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단순히 “나라”와 같은 표현을 읽을 때 이러한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공간적인 표현을 배제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은 “하느님의 영역” 혹은 “하느님의 왕권”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성서의 가톨릭 역에서는 보통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따라간다. 그리고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처음의 세 복음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주제가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되고 있다. 세례 이후 즉시 이어진 스승의 첫 번째 출현은 이러한 훈계로 요약될 수 있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마르 l,15). 공생활 중에 예수는, 그 훈화에서 이 “나라”의 도래 혹은 현존으로 되풀이해서 돌아간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고을과 촌락을 옮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가 8,1). 사도들과 72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첫 번째 선교 사명 중에 주로 나라의 도래를 다룬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려고 그들을 파견하셨다”(루가 9,2). “거기 있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다가왔습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루가 10,9). 제자들의 사도직 여행 중에 예수께서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루가 10,18) 것을 보셨다. 특히 나라에 관한 예수의 담화에서 두 순간이 주목된다. 그분은 어떤 때는 나라가 다가온다고 말씀하시고, 또 어떤 때는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신다. 두 가지 선포는 나아가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주어진다. 그 출현의 초기에 예수는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선들을 쫓아내고 있느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마태 12,28). 나라는 나아가 이미 세례자가 현존하던 때부터 와 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부터는 하느님의 나라가 복음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거기에 들어가려고 힘쓰고 있다.”(루가 16,16).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그분의 담화에서 위협적인 폐허의 징표들을 선포하시고 “이처럼 너희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라.”(루가 21,31)고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나라는 단지 마지막 시기에 올 것인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이러한 긴장에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그 감추어진 모습 속의 나라, 즉 이미 예수의 공생활 중에 땅에 와 있었던 그 비유적인 상황 속의 나라와 마지막 시기에 올 충만한 영광 속의 나라를 구별해야한다. 감추어져서든 드러나서든 나라의 도래는 우리 인간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분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기꺼이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루가 12,32). 소외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질 수도 있는 선물이다.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나라의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설 것이다”(마태 21,43). 나라는 우리 인간들과 독립적으로 있는 반면에 우리는 단지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맹렬하게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애쓸 때에만 거기에 참여할 것이다. 이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산상 담화에서 말씀하신다. 이 나라를 그분은 비유의 담화에서 화려한 빛으로 묘사하신다. 이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마태 6,10) 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그 나라는 나중에 충만한 광채 속에 드러나기 위하여 비밀리에 자라야 한다. 다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라와 동화(同化)하신다. 실제로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사람으로 사시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와 있다.”고 말씀하신다. 충만한 광채인 나라의 결정적인 도래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 것과 비슷하다(마태 16,28; 마르 9,1). 하느님의 왕다운 지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이 계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에 함축되어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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