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복음서에 나오는 “교회”라는 말 시므온 노인이 예언했듯이 예수는 반대받는 표적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과 고백이 나오고 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종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를 상당히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현존에 관해 의문점을 제기한다. 그렇게 갈라지는 의견들은 예수께서 교회 설립 의향을 가지셨는가 하는 물음에 따라 두 개의 주요한 그룹으로 압축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경우라면, 예수께서 신적인 사명을 띠셨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반면에 예수께서 장차 을 세기를 꿰뚫어 볼 수 없었고 그분이 바라신 것과는 상관없이 교회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다면, 예수가 예외적인 천품을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단순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주목할 것은, “교회”라는 말이 마태오 복음에서만 두 번 발견되지만 두 본문 다 예수 자신이 말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예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가설적으로, 교회 - 뒤늦게 조직된 - 가 예수 자신에 의해 유래했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던 복음서 저지에게서 이 말들이 나왔다고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의와 관련된 문제라 하겠다. 우리는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두 가지 말씀을 한층 가까이서 고려해 보아야겠다. 첫 번째로, “교회”라는 말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라고 말씀하시면서 수위권을 약속하신 담화에서 마주친다. 여기서는 분명히 교회의 구성을 가리킨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같은 말을 다음 문맥 속에서 발견한다. “(잘못한 형제기)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l7-l8). 이 두 문장은 끝에서 두 번째 담화의 핵을 이룬다. 마태오가 보존하는 다섯 개의 담화 가운데 두 가지는 사도들에게만 들려준 말이다. 즉 산상 담화에 이어 곧바로 나오면서 선교적 이상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하는 두 번째 담화와, 비유에 관한 담화를 뒤따르면서 짤막한 훈계를 담고 있는 네 번째 담화가 그것이다(마태 18, l-35). 거기서는 열정은 사라지고, 더 이상 장래에 대한 기대를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작은 무리의 제자들에게 - 그들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머물러 있었다. - 그들 자신의 환경에서 상호 관계에 관해 가르치신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내부 구조에 관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짤막한 담화는 몇 가지 흩어진 단편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교회 상황을 가리키는 지배적인 두 가지 생각이 눈에 띈다. 첫 번째 개념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마태 l8,1)라는 제자들의 물음으로 끌어들인다. 예수의 대답은 선명할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분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l8,2-3). 이 본문은 흔히 어린아이의 덜 좋은 성질을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될 때 나쁘게 해석된다. 예수께서 친히 거기에 참된 해석을 덧붙이신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4). 이러한 설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는 우선권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대로 이례적인 특성,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겸손한 비하에 바탕을 둔다 할지라도 명백히 우선권과 관련 있다.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담화는 보잘것없는 이들의 무죄함을 주장하고(마태 18,6-14), 거기에서 이러한 성질이 단지 어린이 안에 있는 매혹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제자의 특성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형제간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제자들은 형제처럼 처신해야 한다(마태 18,15.2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 사이의 권위에 대한 언급이 있고, 이 권위를 갖는 기구는 소송을 제기받은 “교회”와 상당히 들어맞는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오늘날에는 “교회”라는 용어에 더욱 폭 넓은 강조를 두는 반면에 여기서는 협의로 오로지 교계만을 뜻하고 있다. 지적한 두 구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교회”라는 말을 채택하셨는가 하는 물음에 우리는, 긍정적으로, 심지어 그것이 완성된 교회라고까지 대답한다. 예수께서 모임 혹은 집회를 뜻하는 아람어 “카할”(qahal)을 사용하셨을지는 몰라도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통상적인 그리스어의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첫 번째 본문(마태 16,18)의 주인공을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일치하여 예수께 돌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마태 18,17-18)도 그분께 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의 모임 가운데 관리하는 기구를 두고자 하셨고, 구약의 관습에 따라서, 나중에 새로운 전망을 지닌 의미로 밝혀지는 하나의 이름을 주셨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대한 예고 전례력이 끝날 때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 누구나 이 우울한 복음적 단편을 독특하게 느낀다. 한 젊은이에게 고뇌와 세상으로부터의 헛된 도주는 나이든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다른 인상을 준다. 예고되는 거짓 그리스도들은 수많은 종류의 속임수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번갯불과 원경(遠景)에 이리저리 나는 독수리들은 - 비록 다른 색조이기는 하지만 - 인상적인 황폐한 장면을 특히나 음산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반성을 하도록 유도한다. 바로 이것이 담화를 고정시킬 때 복음서 저자의 의도였고, 올리브산에 앉아서 예루살렘시를 내려다보면서 그 도시의 재난과 그것을 통한 온 세상의 재난을 예고하셨을 때 예수 자신의 의도였다. 자신들의 구세주를 맞아들이려 하지 않은 저 백성에 대한 마지막 담화였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의 마지막 담화는 첫 번째 담화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때는 행복한 군중의 열정이 있었는데, 지급은 도시의 우두머리들로부터 박해와 미움이 있다. 그때는 수많은 기적들이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 주었는데, 지금은 수난과 죽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부정(否定)을 확인하려고 한다. 문학적인 관점에서도 복음서 저지는 마지막 담화를 첫 담화와 대조적으로 자리잡았다. 구조 속에서는 현저한 상응이 눈길을 끈다. 두 담화 모두 이례적으로 길다. 두 담화 모두 세 개의 장을 담고 있다(마태 5-7장과 23-25장). 첫째 담화의 진복 팔단(마태 5,3-12)과 마지막 담화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마태 23,13-36) 하는 여덟 가지 “불행”이 상응된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 24장의 첫부분은 여덟 가지 “불행”과 담화 자체가 분리된 인상을 준다.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걸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와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보시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께서 올리브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라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4,1-3). 그러나 이런 분명한 분리는 두 부분 사이의 의미 있는 결합으로 훌륭하게 사라진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마태 23,38)는 “불행”의 결론이 곧바로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가셨다.” (마태 24,1)라는 이른바 변화 안에서 채워질 것이다. 이 변화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어떻게 떨어지는지 보게 해준다. 그것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볼 때 눈먼 우두머리들에게로 향한 담화가 그 핵심부에서 홀로 사도들에게만 전달된다. 따라서 훈계하는 말씀들은 이중 국면을 갖는다. 그것은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위협이지만, 충실한 자들에게는 위로다. 올리브산에 앉으신 진복 담화의 스승은 이제 그분 앞의 허공으로 향하신다. 포기와 끝날에 대한 가혹한 말씀은 따라서 더욱더 비탄스러운 강조를 띠고, 많은 묘비명 사이의 케드론 골짜기에서 메아리친다. 그것은 마치 죽은 이들에게도 훈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황폐해진” 성전의 빈 회랑을 향해 쏟아 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거기서 계속해서 그들의 관습을 행한다. 유일하게 귀기울이는 것은 제자들이다. 그들은 공포심 없이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들은 허둥댄다. 이것은 진복 팔단의 산상 담화 때부터 그리고 군중이 스승을 버린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중대한 변화 탓이다. 그들은 이제 군중에게 연민을 느끼고 불충한 이들에게 생길 것을 느끼면서 전율한다. 담화에서 무엇보다도 공포를 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에 앞설 커다란 고뇌이다. 그것은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칠 것이다. 이 고통은 오심을 예고할 것이다. 그 “때”는 신비에 싸인 채 감추어져 있다. “방법”은 그러나 분병하게 지적된다. 그분은 선과 악을 보상하는 심판관처럼 오실 것이다. 선한 이들은, 마치 유명한 비유의 현명한 처녀들처럼(마태 25,1-13) 결혼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다. 마지막 장(마태 25장)은 보상받는 선에 대한 묘사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받은 달란트에 맞갖은 종은 “잘하였다”는 소리를 듣는다(마태 25,14-30). 궁핍한 이웃을 도와준 이는 누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31-46). 그것으로 진복 담화의 취지는 끝난다. 거기서는 선을 어떻게 행하는가 하는 규범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누구나 자신이 행한 선에 따라 심판받으리라는 것을 확언한다. 마지막 담화의 우울한 부분에서 부수적으로 듣는 것은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마태 24,32)는 말이다. 동일한 유쾌한 수법으로 마지막 시간의 고뇌는 장차 올 기쁨, 즉 사람의 아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안고 오심을 예고한다. 베드로의 제자 마르코 헤로데 아그리파의 박해 중에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 예루살렘 거리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는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사도 12,12). 이것이 베드로와 복음서 저자 마르코 사이의 특별한 유대를 지적하는 첫 번째 언급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오로와 마르코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신빙성 있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우리는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오로의 제자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기 이전에(사도 12,25) 그리고 거기서 키프로스를 경유하여 소아시아의 해안 지방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있었다. 절벽과 깊은 계곡 사이 눈 덮인 산악 길을 지나가야 하는 소아시아의 통과하기 힘든 산악들을 넘어간 뒤 마르코는 동료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몇 해 뒤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계획하였다. 바르나바는 조카(?) 마르코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제안하였으나, 바오로는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들만 일하게 한 사람을 함께 데려갈 수는 없다며 더욱 적절한 판단을 내렸다(사도 15,38). 그러자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바오로와 갈라져 키프로스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62~63년에 마르코가 갇혀 있는 바오로 주위에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골로 4,10). 게다가 바오로는 그를 자기의 동료라고 부른다(필레 1,24). 그 다음에도 우리는 바오로와 접촉하는 그를 본다(2디모 4,11). 그러므로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몇 해를 지낸 뒤 먼젓번의 자기 스승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마르코와 베드로의 관계에 관한 한 우리는 성서에서 단 하나의 명백한 자료만을 발견한다. 이방 로마 - 서방의 “바빌론” - 에서 쓰여진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1베드 5,13) 마르코는 저자에게 “내 아들”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그는 베드로의 정신적인 아들, 즉 제자였다. 이 때문에 초기의 교부들은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이었다고 증언한다. 더 후대의 전승은 이 자료를 훨씬 더 확장하였다. 즉 마르코는 베드로와 백성들 사이에서 해설자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백성은 마르코에게 설명을 청하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으로 고정시켜 줄 것을 되풀이해서 간청하였다. 마침내 그는 승낙하였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베드로 살아 생전에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사도가 죽은 뒤에야 그 일을 하였다. 따라서 전승에 비추어 고찰해 보면, 마르코의 복음은 어떤 때 “베드로의 설교에 따른 복음”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마르코 복음을 읽어 보면, 어째서 복음서 저자가 베드로를 특별히 생각하였으며, 그를 존경하였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곧바로 그의 개인적인 묘사에 의존하였는지 분명히 드려난다. 마르코에 따르면, 실제로 예수의 공생활에 있어서 첫 번째 사건은 베드로의 소명이다(마르 1,16-18). 그 일은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났고, 마르코는 그것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다(마르 1,29-34). 몇 가지 다른 사건들에서 베드로의 현존은 뚜렷하게 언급된다(마르 1,36; 5,37; 9,2-5; 11,21). 베드로에게 영예를 돌리는 사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야기된다. 따라서 마르코는 예수께서 물위를 걷는 것을 언급하는 반면에(마르 6,49-52) 베드로가 파도 위를 걷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마태 14,28-33).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는 베드로의 고백 뒤에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의 다음 말씀이 뒤따르지 않는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 반대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비난이 언급되는데, 뉘우치는 베드로의 고백을 마치 우리가 듣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마르 8,33; 14,37). 따라서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묘사에서조차 자신의 탓이라는 강한 의식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마르 14,71). 마치 베드로의 “내 탓이오”처럼 들린다. 게다가 마르코의 복음에서 부각되는 것은 다른 부분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언어와 문체의 궁핍이 입증되는 반면에 다른 부분에서는 생생하고 이례적으로 상세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활기있는 묘사들은 눈으로 본 증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가 사도들의 숫자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자연스럽고 생생한 보고서에 대한 설명을 바로 목격 증언과 관련하여 찾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앞서 말한 사건들의 어느 누구에게나 베드로는 현존한다. 거기서 사람들은 사도의 성격과 놀라운 일을 분명히 눈치챈다. 그가 설교로 청중들에게 전하고, 마르코를 통하여 두 번째 복음서를 읽는 우리에게도 전하는 놀라운 일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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