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가장 원형적인 마르코 복음 “가장 원형적인 복음”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르코 복음은 많은 면에서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흥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장 짧고 - 16장밖에 안된다. - 가장 직설적이며,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자료들을 - 수난 이야기의 경우는 예외지만 - 한결 짧고 간결하게 다룬다. 그런데도 흔히 말하듯이, 복음서 저자 자신이 단어를 취하는 일이 드물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비전을 거의 표현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원형적인 복음서이다. 마르코 복음(l4,51-52)에 따르면, 올리브 동산부터 예수를 따랐던 젊은이가 마르코 자신이라는 것이 꽤 널리 퍼져 있는 의견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그는 삼베(담요)만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마르코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의 복음서를 읽어 보면, 포착하기 어려운 복음서 저자는 도망가고, 말하자면 손에는 다만 복음서만 남는다. 그의 복음서 안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고 중대한 순간에 더욱 상세하게 언급되는 인물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마르코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베드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은 마르코를 베드로의 통역관이라고 일컫는다. 이 복음서의 특정은 다른 복음서들이 지닌 하나의 노선 혹은 순서가 빠져 있는 것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마태오는 다섯 개의 담화라는 기획을 바탕으로 복음 이야기를 구성한다. 루가는 성지를 두루 거쳐 예루살렘에서 끝나는 여행 중에 계시는 분으로 예수를 소개한다. 요한은 일곱 개의 기적을 선택하여, 그것들과 함께, 상승하는 노선에서 또한 수많은 상징들을 통하여 예수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마르코에서 그와 비슷한 구조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복음 안에는 개인적인 비전이 빠져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태오의 비길 데 없는 스승이나 루가의 자비롭고 관대한 의사는 마르코의 복음에서 지배적인 특색을 띠지 않는다. 확실히 그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러나 드물다.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나 치유에 대한 짤막한 묘사 때문에 마르코는 그것을 독자들에게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게 한다. 아니 어떠한 생각도 지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인칭적 복음서에서, 한 면으로는 복음서 저자의 목소리를 덜 듣는다면 다른 면으로는 교회와 신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느낄 수 있다. 복음서 저자는 자기 자신은 침묵하면서 설교를 가능한 한 젊은 교회에서 썼던 대로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욱 백성과 가까이 일치하고 그의 복음서는 당연히 가장 대중적인 복음서로서 자격을 받을 수 있다. 대중적인 성격은 이미 예수의 모습에 관한 개인적인 비전이 덜한 데서 드러난다. 백성은 하나의 기적을 보고 열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적을 보고도 그랬고 그 다음에도 그랬다. 여론은 많은 기적들 가운데서 하나의 노선을 찾지 않고, 오히려 기적들을 그것들이 표명하는 위엄이란 국면 속에 축적하였다. 마르코 복음에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적들이 “권능을 드러낸다.”는 대중적인 용어로 묘사되고, 수많은 비범한 일들로 불러일으킨 인상에 신뢰가 가게 한다. 악마들을 추방시키는 것은 더욱 분명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마르 1,27).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 예수께서는 악령들을 추방하심으로써 분명히 악마적인 능력을 넘어서시고 모든 영들을 넘어서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인상이 더욱 커진다. 그분은 악령들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 마르코는 백성이 바라는 것에 응하여 예수를 설교가로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두 번 그분의 입에 담화를 담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특별히 탁월한 분이시다. 예컨대, 어려운 상황에서 아니면 그분의 적들에게 압박을 받으실 때도 그분은 그 상황을 뛰어넘는 지적인 응답을 구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바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언제나 생생한 이야기나 놀라운 사건 가운데서 나타난다. 이미 고대의 교부들은 마르코에 대해 저술하면서 그의 복음을 “결정적인 순서가 없는”, 어떠한 연대기적 지적도 없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이러한 고대의 증언을 고려하면서 현대의 비평가들은 짧고 대중적인 이 복음을 “가장 오래된” 복음으로 삼았다. 그들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에게 초기의 자료들에 관한 신학적 반성을 제공한 마태오와 루가나 요한과는 달리 사건들에 더욱 가까이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마태오나 루가의 반영(反影)을 필연적으로 후대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으나 복음서 저자 개인의 작용으로 돌리면서, 마르코 복음을 목격 증인에 따라 태어나는 교회에 제공된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본다. 회개하여라 기쁜 메시지의 첫 번째 활력 있는 공표는 성서에서 “회개하여라”는 말로 요약된다. 기적적인 오순절 사건이 있은 다음에 예수의 겁 많은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용감한 사도들이 되어 백성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베드로는 처음으로 이러한 말로 종합되는 열정적인 담화를 선언하였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오”(사도 2,38). 이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끄집어낸 첫 번째 결론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출현 이전에 이 메시지는 이미 선구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하였다”(마태 3,1-2).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는 선구자에게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입증되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마태 3,4). 마르코와 마태오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첫 번째 현현을 같은 방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나아가 마태오한테는 예수의 첫 번째 설교가 요한이 언급한 말과 문자 그대로 일치한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l7). 그러나 예수의 이 첫 번째 설교를 이구동성으로 보고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주어지는 설명은 상당히 달라진다. 같은 선언이 흔히 아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증거다. 지난 세기에는 “회개하여라”는 말을 “참회를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즉 복음의 관점에 따라 메시지는 말하자면 낙타 털옷에 덮여 있었다. 구약 성서의 묘사는 실상 참회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예컨대 욥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참회를”(욥기 42,6) 하였다. 니느웨에서는 요나의 파견 이후에 왕의 명령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을 모두 버려라”(요나 3,8). 라틴어 번역은 그와 같은 호소를 “회개하여라”로 이해하였고, “참회를 하라”는 말로 그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세기 동안 이러한 번역은 적어도 서유럽에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서유럽 지역에서는 복음서의 첫 번째 호소가 “참회를 하라”는 용어로 인정되었다. 16세기에 인본주의자들은 라틴어 번역을 무시하면서 오로지 신약 성서의 원문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회개를 뜻하기 위해 채택된 말이 “영” 혹은 “의향”을 뜻하는 명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를 취하여 예수의 호소는 “의향을 바꾸어라.” 아니면 “영적으로 변하여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루터는 이 번역을 알았고 그것을 선업(善業)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채택하였다. 많은 일들 가운데서도 육신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은 회개에서 영적인 요소에 새롭게 강조를 두고 있다. 즉 회개는 의향의 변화와 영의 쇄신을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 있는 영적 설명이며 새로운 가르침, 즉 육신과 영혼, 영과 육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비전 - 그러나 루터의 의도와 전혀 다른 - 과 부합한다. 이 새로운 비전은 어떠한 것인가? 예전에는 모든 사람 안에서 육이 영을 거슬러 싸운다는 성 바오로의 편지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얻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본문들에 육체적인 참회의 실천이 근거를 두었다. 반면에 현대의 해석학은 “육”에서 더 이상 인간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고 오히려 - 순수하게 셈족의 의미에서 - 회개 이전의 죄 많은 상황에 있은 전인간(全人間)을 본다. 회개가 없이는 인간은 “육”이다. 하느님과의 부자(父子) 관계를 통하여 그는 “영”이 된다. 즉 회개 안에서 인간은 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하느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회개는 분명해진다. 옛 번역 “참회를 하라”는 포기할 수 있다. 참회의 과업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다만 영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는 엄청난 오류가 감추어져 있다. “육”을 전인간을 뜻하는 용어로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영”이란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의 유일한 상위 부분과 관련된다. 셈족의 심성에 비추어 볼 때 단지 “육”이란 말뿐이 아니라 “영”이란 용어도 전인간을 가리킨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루가 1,46-47). 이는 전인간의 기쁨이다. 영의 변화는 따라서 육신을 포함하는 전인간의 변화다. 고대의 설교에서는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육체적인 참회에서 회개를 찾았던 반면에, 현대의 설교에서는 지나치게 쉽게 그러한 점을 소홀히 한다. 완전한 회개는 전인간의 변화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l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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