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마르코의 진정한 의향 마르코에 나타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선약 성서를 펼쳐 보면 마르코 복음이 극히 짧다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히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은 28장이고 루가 복음은 24장인데 마르코 복음은 16장뿐이다. 게다가 또 마태오나 루가 복음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상세한 부분이 마르코 복음에서는 아주 간결해진다. 마르코는 얼마 안되는 말을 채택하고, 그 묘사에 있어서도 더욱 절도 있으며, 사실을 생생하고 간결하게 제시할 줄 안다. 그는 중요한 점은 격언조로 고정시킨다. 따라서 곧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한다. 아주 자주 쓰고 있고 두 번째 복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은 “곧”이라는 말이다. 마르코는 그것을 4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일화는 급히 다른 것을 따라 나오며, 따라서 그의 복음은 신속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복음서 저자는 어떤 일화에 더욱 풍부히 머물러 있기 위하여 이러한 묘사 방법에서 벗어난다. 마태오나 루가에는 없는 말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게다가 그러한 묘사들은 몹시 정확하고 사소한 특성에 이르기까지 사건들을 고정시킨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이 그런 경우다. 기적은 세 공관 복음서 모두에 나타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마태오나 루가와 비교하도록 해준다. 마태오는 앞서 말한 부활을, 복음서 저자에 따라서 산상 담화의 뒤를 이어 바로 나오는 아홉 가지 기적군(奇籍群) 안에 제시한다. 따라서 기적군은 하느님의 나라가 정말로 지상에 세워졌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마태오의 개념에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 안에 요약되어 있는 메시아적 약속의 성취이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마태 11,4-5). 즉 아홉 가지 기적군은 이러한 메시아적 이상이 그 모든 면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게 한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기적은 그렇기 때문에 폭 넓고 상세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선에서 고정되고, 마태오의 기획을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마르코의 계획은 다르다. 그는 이러한 사건에 관해 그가 알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기적은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에서 호수 동편으로 돌아오셨을 때 일어났다. 그분은 다른 편에서 배를 타고 오셨고 여전히 호숫가에 계셨다. 이러한 모든 특수성은 마태오나 루가에는 빠져 있다. 그러자 군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오게 된다. 마르코는 이 사람이 회당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예수를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죽어 가는 딸을 위해 그분이 개입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한다. 잠시 중단한 뒤, 마르코는 야이로의 종들이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고하러 왔다는 것을 전달하면서 말을 계속한다. 이러한 메시지에도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라오게 하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큰소리로 우는 사람들을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신다. 마르코만이 예수께서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발을 들여놓으시고 소녀에게 “탈리타 쿰”, 즉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마르 5,41). 그리고 또한 마르코만이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마르 5,42)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는 결론으로서 기적 이야기를 종결지을 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과정을 다시 취한다. 자신의 복음에서 마르코를 따르는 루가는 기적에 대한 묘사에 많은 작은 특징들을 그로부터 끌어 왔으나 이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복음의 의향을 부각시킨다. 실제로 그는 먼저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말함으로써 극적인 요소에 강조를 둔다(루가 8,51).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로 약간 앞에, 이야기가 부모의 행복으로 종결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루가 8,56). 즉 루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분이다. 마르코가 다만 어떤 기쁨을 위해서만 기적을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역시 마태오나 루가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 기적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폭 넓게 묘사하고 있는 악령의 군대를 몰아내는 이야기에 붙이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 대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악령과 죽음의 지배자로 나타나신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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