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천사의 노래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 최초로 베들레헴의 들 위에 울린 천사의 노래는, 20세기가 지난 뒤에도 변함없이 성탄 밤의 고유한 분위기와 열기를 알리는 노래가 되고 있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아기의 탄생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성탄 예식의 요약이요 성탄 축하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천사의 노래를 성서가 아니라 전례를 통해, 다시 말해서 창미사와 특히 성탄 밤의 기쁨이 넘친 예식을 통해 알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천사들의 노래를 인식하는 이러한 방식은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예식을 통하여 성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유스러움도 따른다. 서방 교회는 전례에서 주로 성서의 라틴어 번역문, 즉 이른바 ‘불가타’를 채택하는 반면에, 그리스어가 전례 용어인 동방 교회에서는 성서 본문을 바로 그리스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상황은 동방 교회에서 불리는 천사의 노래가 서방 교회가 따르는 구절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실상 차이점은 단 한 글자의 누락과 쉼표 하나가 덧붙여져 있다는 점으로 좁혀진다. 이 두 가지 작은 변화 때문에 그리스 전례는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에게 기쁨”이라고 번역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성서의 아주 많은 고대 수사본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사본의 편집을 맡았던 그리스 수도승들이 그들의 전례 노래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스(Bass) 지역에서는 이러한 번역이 1637년경의 국가 성서라 불리던 프로테스탄트 성서와 이른바 루터 역이라는 성서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번역서들로부터 삼중 축복, 즉 영광, 평화 그리고 기쁨이 네덜란드의 성탄 노래에 흘러들었다. 본문에 대한 한 정밀한 연구로 이러한 삼중 구분은 지지받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권위 있는 수사본들은 이등분된 절을 제공한다. 하느님께 대한 영광 앞에 사람들에 대한 평화가 있다. 하느님의 영광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 부여되는 반면에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땅에서’ 발견된다. 즉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다. 이 구절은 거의 모든 번역서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번역에서 어려움은 마지막 단어에 있다. 즉 ‘기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이다. 라틴어 전례는 그 말을 ‘착한 뜻’으로 대체한다. 즉 착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게 평화다. 그 경우에 ‘기쁨’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즉 인류를 나쁜 사람들과 착한 뜻을 지닌 사람들로 가정하고 있다. 착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성탄의 평화가 내려온다. 3세기 혹은 4세기부터 비롯되는 이 라틴어 구절에서 가톨릭은 은총과의 협력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발견한다. 다른 번역은 하느님 안에서 기쁨이라고 대치하여 하느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사람들 위에 평화가 내려오도록 한다. 이러한 번역을 지지하는 것은 어쨌든 최근에 발견된 꿈란의 수사본들이다. 그 수사본들은 하느님의 기쁨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하고 흔히는 ‘하느님의 기쁨’ 혹은 ‘그분의 기쁨’을 대신하여 ‘기쁨’이란 말을 다른 설명 없이 쓴다. 그러한 기록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꿈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에 의거해서 성서에 따른 하느님의 예정을 생각할 수도 있을까? 구약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이었다. 나중에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성탄의 평화가 온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그래서 그러한 말들에서 예정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만 부분적으로라면, 어째서 예정이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반면에 그 부정(否定)은 전적으로 그분의 분명한 의지 밖에 머무르는가. 즉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따라서 어떤 번역들은 옳게도 중도를 찾는다.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나 사람에게, 첫 번째로 운명지워진 아브라함처럼 확실한 준비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톨릭 성서는 이렇게 번역한다. “땅에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혹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러한 표현에는 아무런 제약도, 아무런 ‘예정’도 없다. 오로지 전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인류를 위해 사람이 되신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일 뿐이다. 마지막 어려움은 그래도 남는다. 천사의 노래는 축하만을 담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는가?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축하는 그것이 예수의 삶으로 실현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입증에 대해 말하자면, 천사의 노래는 그것이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환호다. 창조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영광이 올라가고 평화는 이미 사람들에게 내려왔다. 이 경우에 ‘영광송’은 이미 현재하는 구원을 기리는 노래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1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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