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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47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불린 사람들

 

성 아우구스띠노의 작품에서는 세상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이론이 발견된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들의 타락 때문에 비게 된 하늘의 자리를 채우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들의 대용품이 된다. 아우구스띠노 이후 이 생각은 중세 후기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동의를 얻었다.

 

신약 성서의 어떤 책들에서, 특히 마태오 복음과 로마서에서 아우구스띠노의 이론을 완전하게 해줄 수도 있는 비슷한 지적이 발견된다. 뽑힌 백성이 자신의 소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리에 이방인들을 부르시어 상속인이 되게 하셨다. 이 점에 대한 바오로의 본문은 유명하다.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같이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입니다”(로마 11,17). 이에 대해 마태오 복음에서는 수많은 본문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마태 21,43). 또는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8,11-12)

 

사람의 창조에 관한 아우구스띠노의 이론만이 합당한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소명에 대한 마태오의 생각에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미 마태오는 이러한 방향으로 몇 가지 암시를 하고 있다. 예컨대, 예수의 족보에 네 명의 이방인 여자를 넣고, 의심의 여지없이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을 아기 예수 곁에 오게 한다. 그는 자신의 기록에서 뽑힌 백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방인들의 소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루가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방인 출신인 이 복음서 저자는 이방인들의 소명을 같은 지평에 놓기 위하여, 그리고 때론 더 높이 놓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예정에 관해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행한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은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태도에 대하여 가혹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루가 4,25-27).

 

루가 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은 공감이 가고 고상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세례자 요한 곁에 모여든 군중 가운데는 자연히 군인들도 있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이 이방인 점령자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루가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참회를 설교하는 요한의 모습에 감동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루가 3,14). 백인대장 - “주여, 저는 합당하지 못합니다.”라고 간청한 첫 번째 사람 - 에 대해서도 루가는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그만이 이 장교에 대해 군중이 말한 바를 이야기할 줄 안다. “그 백인대장은 도와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루가 7,4-5). 서자로서, 이방인들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멸시를 받던 증오의 대상 사마리아인들조차 루가는 본보기로 제시한다. 예수께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한 명만이 돌아왔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루가 17,16). 루가 덕분에(루가 10,30-37), 착한 사마리아인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눈앞에 머물러 있다.

 

예수의 수많은 말씀들을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배척하는 회의적인 평가도 이구 동성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예수의 순수하고 솔직한 교리 한 가지로 간주한다. 그리고 오늘날도 나블루스(Nablus)에 머물러 있는 소수의 사마리아인들은 루가 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존경심 담긴 말씀을 분명하게 환기하면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해와 평가를 구한다.

 

마태오가 사도들의 파견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직무를 주신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마태 10,5). 그러한 제한은, 열두 제자의 파견을 언급은 하나 금지하는 말이 없는 루가 복음과는 전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두 번째 파견을 참고해 볼 때, 그는 일흔 두 명의 제자에 대해 말하는데,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백성들의 명부와 비교되는 것으로, 이방인들에 대한 파견을 가리킨다.

 

루가 복음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파견은, 이미 태어나신 아기로부터, 성전의 봉헌에서 빛을 발한다. 아기는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곧 이어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된다(루가 2,32). 루가 복음에서 예수의 사명의 결론도 마찬가지로 의미 심장하고 중요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루가 24,47) 죄인들이 용서받도록 참회를 설교하라고 명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구원 경륜에서 뽑힌 백성과 같은 지평에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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