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인간의 고뇌를 굴복시킨 천상의 의사 불의한 제물 번역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복음서의 그리스어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아람어 혹은 아람어식 표현과 마주치게 된다. 아람어는 그리스도 시대에 성지의 대중 언어였다.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군중들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고 설교하셨으며, 아마도 같은 말로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논쟁을 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아람어는 예수께서 팔레스티나에서 생활하셨고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한테 확신시킨다. 그런데 복음서의 아람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루가가 그리스인인 점을 고려해 볼 때 루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완전한 아람어식 표현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마태오와 요한은 그들의 모국어를 아주 기꺼이 인용하는 반면에, 루가가 어떤 일을 아람어로 이야기하는 때는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람어 가운데 하나는 ‘재물’(mammon)이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가 독자들한테 더욱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하여 짤막한 인용구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는 말이다(루가 16,9. 11. 13). ‘재물’이라는 말은 아마도 진실과 확신을 가리키는 ‘아만’(aman)이라는 동사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멘’(amen)이라는 형태는 정신적인 일에 대한 믿음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는 반면에, ‘마몬’이라는 형태는 물질적인 일, 즉 재산과 돈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기 위하여 쓴다. 아우구스띠노는 카르타고의 옛 언어에서 ‘마몬’이 ‘이윤’을 뜻했다고 이야기한다. 루가는 이 낯선 말을 고의로 번역하지 않았다. 사람한테 종속되기보다는 오히려 지배자가 되는 돈을 의인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돈은 사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지만 재물은 그 반대를 생각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면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인간 전체를 넘겨주는 것을 가정한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요구하실 권리가 있고 마몬 우상은 그것을 갈취하려 애쓰는 것이다. 선택에 직면한 인간은 “한편을 존중하고 한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루가 16,13). 여기서 루가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조롱했다는 것을 주목한다(루가 16,l4). 그들의 돈에 대한 탐욕에는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여백이 없었다. 이러한 묘사가 있기 바로 전에 루가는 비슷한 본문을 언급한다. 거기서는 재물 앞의 사람의 태도가 정신적인 평가의 수단이 된다.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마몬)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루가 16,11) 이러한 숙고에 앞서 루가 복음에는 상당히 의미 심장한 비유가 나온다. 그것은 불충한 청지기의 비유다. 읽을 때마다 이 비유는 충실한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그것은 모두한테, 청지기가 재물의 노예이며, 사로잡혀 있던 우상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지려고 애쓴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그는 재물의 도움으로 친구들을 얻기에 이른다. 그는 지배받던 종에서 돈을 지배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루가 16,9). 루가의 스승인 바오로는 널리 알려진 본문에서 재물에 대해 거의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디모 6,10). 그들은 종들처럼 재물을 섬기기 위하여 하느님을 포기한 것이다. 재물에 대한 복음서의 이러한 판단을 바오로와 그의 학파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나, 다른 곳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때때로 부자들의 친구라고 했던 마태오는 예수의 경고를 보존하였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미 구약 성서에서도 이런 문장이 발견된다. 게다가 우리는 ‘재물’이라는 같은 용어가 금언의 핵심임을 발견한다. 그것은 신약 시대 얼마 전에 만들어지고 로마 미사 경본이 자주 권고로 삼고 있는 축복 안에 있다. 즉 “황금을 쫓지 않고 책잡힐 일이 없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 31,8)는 구절이다. 우상과 세기적인 전쟁 후에 남는 것은 오로지 재물인 것처럼 보인다. 재물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버린다. 재물을 지배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 의사가 묘사한 부활 열렬한 호교 시대에 - 거의 말기에 - 복음서들은 예수의 신성에 힘입어 유력한 논지의 병기고로 이용되었다. 게다가 복음서들은 한가지로 이러한 목적에 맞게 기록된 것처럼 사용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논지는 기적적인 이야기에서 그리고 가장 크게는 신자들한테 각기 다 알려진 세 번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서 개체화되었다. 나인의 젊은이의 부활과, 야이로의 딸 그리고 라자로의 부활이 그것이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을 마태오, 마르코, 루가가 묘사하는 반면에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묘사는 요한 복음에만 나타나고, 나인의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는 루가 복음에만 나타난다. 루가는 의사였다. 고대의 호교론적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의사 루가한테서 논지에 대한 적합한 정식과 한층 명백한 요소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다. 루가는 기적의 호교론적 가치에 대하여 최소한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들을 묘사하면서 신속하게 기적적인 특성으로 넘어간다. 의사로서 루가는 분명히 죽음에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의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죽음 앞에서 무능함을 자주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는 이 이야기에서 극단적으로 온화하다. (예수께서)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가 7,14-15). 사건은 예외적인 일로 보이는 것 같지 않다. 혹 어쩌면 루가는 의사가 아니었을까? 이른바 ‘작은 헤르몬’의 발치에 있는 오늘날의 나인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방문하여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서 루가의 구절을 다시 읽어 보면, 화가인 루가의 눈에 그곳의 전승이 어떻게 보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산의 돌출부에 자리잡은 마을 자체는 그곳이 고대 도시가 생겨난 곳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루가는 나인이라는 ‘도시’와 ‘도시의 성문’이라고 말한다. 성문은 대체로 슬픈 행렬에 명백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이용된다. 도시의 성문의 어두운 로마식 아치로부터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하얀 천으로 싸인 시체가 나타난다. 성문의 어둠 속에서, 상여 바로 뒤에 비탄에 빠진 어머니가 따라 오고, 그 앞에 근동의 투병한 햇살을 받으며 예수께서 서 계신다. 외적인 사건에 대한 이러한 표현에 곁들여, 이야기는 사람들의 내적 성향을 끄집어내는 수법을 통하여 화가의 색채를 더욱더 띠고 있다. 특별한 강조로 사건의 극적 특성은 분명해진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 하고 위로하셨다”(루가 7,13). 루가의 눈에 기적 자체는 예수의 연민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행위의 정점은 그 안에 담긴 부활이 아니라 어머니한테 주어진 축복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몰려주셨다”(루가 7,15). 이 어머니의 슬픔과 기쁨 사이에 예수의 모습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기적은 예수가 누구이며 이 지상에서 그분의 근본 사명이 어떤 일인가를 드러내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마르코는 여러 가지 악마 추방 사건을 근거로 하여 예수께서 어떻게 악령들보다 위대하신지 또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충만한 권능을 지니고 계신지를 보여 주려고 애쓴다. 외교인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능력 있는 구상은 이것이다. 마태오는 구약 성서의 기다림이 새로운 메시아 왕국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적들을 모은다. 그것은 히브리인과 구약 시대부터 그리스도를 찾아온 모두한테 인상을 주는 공들인 작품이다. 루가 복음에서 기적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게 해준다. 즉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관대하신 선(善)이 실현된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루가의 시각에서, 예수는 모든 인간의 고뇌를 굴복시키는 천상의 의사다. 그분은 모두에게 구원자요 자비로운 구세주다. 이것은 유다인과 새로 개종한 외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상을 줄 수 있는 이미지다. 그것은 의사 루가가 그런 그리스도의 회화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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