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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엠마오로 향해 가는 두 제자의 논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3,43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엠마오로 향해 가는 두 제자의 논쟁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

 

주의 기도의 두 가지 양식, 즉 루가 복음의 짧은 양식과 마태오 복음의 그보다 긴 양식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보통 긴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덜 알려진 루가 복음 11장 2절부터 4절의 본문은 별로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짧고 간결한 이 양식은 루가가 그렇게 중요한 기도로 여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첫 시작부터가 우리 귀에 조금은 딱딱하게 들리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대신에 단순히 “아버지”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로 이 “아버지”라는 짧은 용어가 루가 복음에 확산되어 있는 신성하고 독특한 분위기 안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나타낸다.

 

루가는 바로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인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15,11-32)에서, 감동적인 그림으로 예수님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초상(肖像)을 그린다.

 

여러 경우에 루가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예수와 성부 사이의 신비스러운 유대를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긴밀한 관계로 부각시킨다.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그분의 아들을 향해 장엄한 선언으로 울려 나온다. 그러나 마태오에 따르면(3,17) 그 목소리는 다른 이들을 향해 울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나누는 담화이다.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듯이, 예수 역시 말하자면, 그분의 생애에 특별한 인상을 주는 순간에 직접적으로 그분의 아버지께로 향하신다. 예를 들어 루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 장엄하게 감사 드렸다.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루가 10,21). 올리브 동산에서 그분은 고통과 고뇌 속에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 22,42). 이것은 가장 오래된 세 복음서 모두에서 발견되는 기도다.

 

그러나 루가의 복음에서, 아버지와 접촉은 고통이 증가하는 만큼 더욱 강렬해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분은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올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그리고 영혼을 바치시기 전에 갈바리아 산에서 다시 한번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번번이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란 말로 시작된다. 그것은 어떻게 하느님께로 향해야 하는가 하는 모범을 우리한테 보여 주신 것이다.

 

대체로 복음서들보다 더 오래 된 성 바오로의 편지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고대 기도에 대한 보고(報告)를 두 번 발견한다. 바오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예루살렘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드렸던 언어인 아람어를 보존하고 있기까지 한다. 이 아람어는 고대성과 전통성을 보증해 준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방법을 가르친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고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빠, 아버지’라는 짤막한 기원으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아빠’라는 말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치는 기도를 듣고 예수의 목소리를 느끼는 우리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면 기쁠 것이다. ‘아버지’를 가리키는 평범한 말은 ‘압’이다. 이보다 긴 형식인 ‘아빠’는 더욱 긴밀한 색조, 감동적인 어조를 강조하는 과장법을 표현한다.

 

근동의 옛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토모, 테오도로 그러고 테오도레토 같은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의 교부들은 우리한테 이 값진 자료에 눈길을 모을 수 있게 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들의 모국어는 예수 시대의 아람어에서 나온 방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빠’라는 말이 아버지한테 아기가 하는 특별한 표현이라는 것을 이구 동성으로 밝혀 준다. 그것은 아이들이 쓰는 말이며 참으로 유아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우리 언어로 다만 ‘아버지’란 말로 번역된 말은 이러한 긴밀한 감정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올 아버지”처럼 수식어를 덧붙이거나 각 나라마다 고유하게 ‘빠빠, 밥바’처럼 전통적인 가족적 표현을 쓴다. 그러면 그것은 아기들의 참된 표현이 된다.

 

이런 사실을 살펴볼 때, 루가에 따른 ‘주의 기도’의 분명히 냉정하고 간소한 서두는 감정과 긴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기원인 반면에, 마태오의 형식은 덜 인간적이다. ‘아버지’에 덧붙여진 ‘우리’라는 수식은 일정한 공동체, 엄밀하게는 유다 공동체를 생각하게 한다. 게다가 하느님이 하늘에 - 이 하늘은 틀림없이 성서 · 유다적인 복수(複數)다. - 계시는 분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고유한 형식을 제공한다. 루가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아빠’로 시작하고, 또한 우리한테 그렇게 가르치신 기도에는 정녕 신뢰와 애정에 싸인 서두, 즉 “사랑하는 아버지,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로 되어 있다.

 

 

루가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신약 성서의 개별 기록들이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 고유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시각에 따라 그들의 이야기와 성찰을 배열했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암시했다. 그것은 모든 이들한테 당신의 업적과 가르침으로 도움을 주시가 위하여 팔레스티나의 길을 지나가시는 천상의 의사요 은혜를 베푸는 분으로 예수를 소개하는 루가 복음에서 특히 명백하다. 그의 복음에서 천상의 의사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 병들고 죽어 가는 육신, 괴로워하고 큰 고뇌를 안고 있는 영혼들한테 충만한 사랑을 베푸신다. 바오로 곁에서 고대 세계를 두루 다녔던 고대의 선교사 루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어떻게 천상의 의사가 은혜를 베풀며 다니셨는지, 모든 이를 만나시기 위해 어떻게 그분의 삶이 길고도 폭넓은 여행길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제 우리 각자와 함께 그 삶을 따르고자 한다.

 

루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교의 삶은 그분의 공생활과 함께 곧바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사실, 즉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쫓겨나신 사건은 그 발단이 된다.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29-30). 이제부터 우리는 그분이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시기 위해 갈릴래아의 도시와 마을을 두루 순례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행에 대한 대보고서로 말려진 루가의 그 장들은(9,51-18,14 참조) 예수님의 삶이 은혜를 베풀며 여행하시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세 번째 복음서의 특징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루가의 시각을 알려 준다. 이 장들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성지 전체를 통과하셨다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이 루가한테는 예수님의 놀라운 삶을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데 더욱 교육적이고 효과적인 수법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바로 루가가 타볼산에서 예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셨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여행을 끝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같은 루가에 따르면, 그분께 충실한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그들의 삶의 길을 지나가신다. 엠마오로 향해 가는 두 제자가 논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낯선 분처럼 나타나시어 그들의 논쟁에 끼어 드셨다. 그분이 그 며칠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태도를 보이시자 그들이 말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루가 24,18). 그래서 그들이 염려하는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려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루가 24,19-21).

 

그러나 걸어가던 두 제자는 그들의 여행 동반자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분의 말씀은 성서 본문뿐만 아니라 그들의 슬프고 의심스러운 마음까지도 열었다. 따라서 그들한테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낯선 사람에 대한 관심, 예수께 대한 사랑이 꽃피게 되었다. 성서를 그런 식으로 읽은 적도, 그리스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엠마오에 도착하자 그들은 여행의 동반자한테 함께 집으로 들어가기를 청했고, 여행 중에 의심했던 사실이 빵을 떼어 주설 때 마침내 현실로 드러났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두 제자처럼 비탄에 빠지고 주저하지는 않는가? 우리 역시 빛의 말씀 또는 우리 문제에 대한 해결, 성서의 한마디를 갈망하지 않는가? 어쩌면 요점은 조금 바뀐다. 즉 초기의 제자들이 고통에 대한 설명을 갈망한 반면에, 우리는 오히려 부활에 관한 그리고 특히 우리의 부활에 관한 한마디 말씀을 갈망한다. 그리고 위안과 설명의 말씀을 우리한테 주시는 분은 언제나 예수님뿐이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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