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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못과 회당의 역사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73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못과 회당의 역사성

 

 

다섯 행각으로 둘러싸인 못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틀리지 않는 문체와 고유한 시각을 지닌 사상가요, 해박한 신학자다. 과장하지 않고도,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묵상하고 명상한 신비가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세 복음서 저자가 무엇보다 역사적 관심을 갖고 어느 정도 공들인 일련의 사실들을 제공하는 반면에,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교의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의에 관한 깊은 숙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얼마 안되고 빈약한 사실만으로도 그한테는 충분하다.

 

게다가 네 번째 복음서의 얼마 안되는 사실들이,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빠져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요한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크게 의심했고, 이야기들과 특히 기적들이 복음서 저자의 사상과 교의를 분명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꾸며 내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일종의 예증 자료라는 생각이다.

 

나아가 숭고한 신비적 명상을 보더라도, 네 번째 복음서가 어떤 모양으로 도 겐네사렛 호숫가의 작은 마을 출신인 갈릴래아의 한 어부가 쓸 수 없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지지한다. 그렇듯 심오한 작품이 첫 번째 그리스도교 세대 동안에 구성되었을 리 만무이고, 적어도 2세기말이나 3세기초에 기원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날짜가 요구되는 것은, 거기에 담겨 있는 교의가 높고 원숙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전작품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는데, 그리고 저자가 역사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교의에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요소들을 이야기했으리라는 것을 가정하는 데 더욱더 큰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지자들에 따르면, 네 번째 복음서의 비역사적이고 신비화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예 가운데 하나는 베짜타 못가의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요한 5,2)는 구절이다. 몇 세기 전부터 이 못은 성전 공터의 북쪽에, 십자군들이 12세기에 성 안나를 기려 교회를 세운 장소에 있었다. 발굴 작업 중 거기에서 이미 1871년에 못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복음적 단편에 대한 이론(異論)은 직설적이었고 못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 다섯 행각에 대해서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어떤 건축가가 오각형의 못을 고안해 낼 수 있었겠느냐? 어떤 석수장이가 바위에서 그러한 기획을 쪼아 냈겠느냐? 그리고 어떤 환상가가 둘레에 오각형의 행각을 세웠겠느냐? 따라서 다섯 행각은 ‘꾸며낸’ 자료이고 네 번째 복음서를 쓴 사람의 신비적 사색에 부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실제로 저자는 여러 곳에서 특별한 애정을 갖고 물을 구약의 교의의 상징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에서 관찰한 바 있다. 특별하고 예외적인 일로 성조에게 돌려지는 야곱의 우물물은 살아 있고 무한히 훌륭한 물로 상징되는 예수의 교의와 비교되어 묘사된다(요한 4,10-15).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은 구약의 정결 규범과 관련되어 명백하게 설정되고(요한 2,6)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술로 변화된다. 바로 구약의 교의의 상징을 베짜타 못의 물에 주기 위하여 저자는 그 물을 모세 오경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 상상의 다섯 행각에 둘러싸이게 한다. 이러한 목적과 함께 저자는 자신의 교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넷’이라는 숫자를 다섯으로 바꾸었다! 왜곡의 전형적인 예다!

 

그러나 역사와 고고학은 우리한테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가? 베짜타(또는 베데스타) 안팎에 대한 발굴 결과, 이미 얼마 전부터 알려져 있던 웅덩이의 연장된 부분에서 앞의 것과 거의 동일한 다른 큰 웅덩이가 발견되었다. 인접한 두 개의 웅덩이는 이등분된 하나로 생각된다. 그것들은 암벽으로 서로 분리되었고, 암벽 위에는 다섯번째 행각이 세워졌다. 못은 네 개의 주된 면 위에 세워진 네 개의 행각에 둘러싸인 장방형의 못이었고, 가운데 다섯번째 행각은 대칭을 이루기 위해 가장 긴 두 개의 행각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은 불가능한 건축술이 아니고, 건축학상 정당화하는 동질의 복합물이었다. 따라서 신학 저자의 신비화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풍부한 복음에 이용되는, 실재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가파르나움의 회당

 

티베리아데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겐네사렛 호수의 남쪽 연안에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폐허가 된 작은 도시가 있다. 그것은 정교한 발굴 작업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다다르기 전에 이미 Kefar-Nahum이라고 써 있는 이정표는 그 폐허가, 공통된 의견으로 복음 이야기의 가파르나움에 속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그러한 동일시에 편을 드는 논거는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고고학자들이 있다.

 

그 폐허의 핵심부에는 잘 보존된 그리스 양식의 원주들이 있어, 그곳이 한때 회당이었음을 드러낸다. 바로 원주 앞에서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집회를 가졌던 신성한 공간을 보게 된다. 틀림없이 현관이 있었을 이 공간 앞에 풍부하게 제작된 수많은 돌들, 받침다리[角柱], 주춧돌, 거의 모두가 초목과 꽃들이 많은 세계로부터 들여온, 다양한 장식물들로 이루어진 값진 장식품들의 잔해가 쌓여 있다.

 

이 받침다리들과 신성한 공간은, 여러 차례 가파르나움의 회당이 복음서에 언급되는 까닭에, 우리의 숙고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에 거주하였고 두 명의 복음서 저자는 그가 회당의 우두머리였다고 우리한테 이야기한다(마르 5,22; 루가 8,41). 회당의 원주들은 따라서 야이로를 다시 상기시키고, 정신적으로 우리는 원주 곁에서 그를 예식에 참석한 유다인들과 함께 본다.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시는 것이 부당하다고 간주한 복음서의 백인대장은 가파르나움에 주둔지를 두고 있었다.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되며…….”라는 그의 말은 아직도 전세계에서 날마다 반복된다. 이방인들한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루가는 점령군의 이 장교가 유다인들한테 얼마나 존경받았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루가 7,5 참조). 침묵 속의 폐허는 유다 의식에 은혜를 베푼 이방의 점령자를 경탄해 마지않게 해준다.

 

그런데도 더욱 충격적이고 이 폐허와 연결된 사건이 요한 복음에서 광야에서 빵을 많게 한 기적 바로 뒤에 언급된다. 잘 알고 있듯이, 그 기적 뒤에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해 가셨고, 사도들은 배를 탔고, 군중은 제 몫을 받고 떠났다. 다음날 가파르나움의 주민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회당에 계신 것을 발견하였고 이 상황에서 그분께로부터 더 이상하고 신비로운 단언을 듣게 되었다. 지난 스물네 시간의 사건들은 여전히 단순하고 믿지 않는 그 무리를 흥분시켰다. 그러한 만남에서 교환된 많은 말에서 요한은 니코데모의 대화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와 비슷한 대화를 구성하였다. 두 가지 일이 눈에 띈다. 자연적 지평에서 점차적으로 초자연적 지평으로 넘어감과 정밀하고 정확한 형식으로 신앙을 준비하는 불신의 물음들이 그것이다.

 

자연적인 자료 또는 출발점은 전날의 빵이다. 그것은 기적적으로 붙어났으나, 육신의 배고픔을 해소하도록 정해진 자연적인 빵이었다.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잡아 예수께서는 그분의 청중들한테 다른 빵을 선포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요한 6,3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이 대화에서 구체적인 물음들은 앞의 대화에서와는 달리 수없이 많고 한층 예리하며, 더욱 심오하다. 회의는 더욱 강하고 위협적일 뿐 아니라 확장되고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한다.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요한 6,41-42)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요한 6,60). 오로지 열둘만이 어려운 말씀에도 남았으며 더욱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했다.

 

호교론적 동기에서, 많은 가톨릭 해석학자들은 가파르나움의 대화를 둘로 나누고 싶어 하였다. 첫 번째 부분(요한 6,36-47)에서는 빵이 형상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두 번째 부분(요한 6,48-58)에서는 성체성사의 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가 이 대화에서 그렇게 다른 두 가지 개념을 품고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 성서적 관점에서 고려해 보면, 담화는 성체성사적 빵을 광야에서 불어난 빵과 관련짓고 있다고 할 필요가 있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대화의 강한 표현을 복음서 저자와 그에게 복음을 쓰도록 영향을 미친 교회의 탓으로 돌린다. 또한 소아시아의 서부에서 유래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생각한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쨌든 가파르나움 회당의 고고학적 재발견과 다량의 화폐들을 볼 때, 우리는 회당의 자료에 대하여 조심성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아야 한다. 사실 그 회당은 기원후 2세기경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회당이 이미 예수 시대에 있었다면, 의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없었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최근에 발견된 회당이 예수 시대의 옛 회당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고고학적 결과들과 요한의 대화에 관한 새로운 시각에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놓인 가르파나움의 폐허에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 - 많은 이들이 그분을 포기했다. - 과 논쟁하시는 예수를 본다. 동시에 그분을 둘러싸고 그분께 충실히 머무른 사도단이 믿음 안에 성장하는 것을 본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1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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