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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군중들에게 배척당한 왕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6 조회수2,71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군중들에게 배척당한 왕

 

 

총독 앞에 선 왕

 

복음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격을 왕으로 묘사한 복음서가 있다면 그것은 네 번째 복음서다. 또한 요한에 따르면, 초기에 예수는 왕권을 피하고자 하셨고, 나아가 왕권으로부터 도망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요한 6,15).

 

반면에 강조되는 것은 왕권에 대한 이러한 언급이 수난 이야기의 다양한 순간에 그리고 특히 요한의 이야기에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수난 중에 왕다운 영예를 받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 앞에서 그것을 분명히 변호하셨다.

 

수난주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개선, 입성하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네 복음서 저자 모두는 이 사건을 자기 방식대로 묘사하는데, 비록 루가와 요한만이 군중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왕’이라는 칭호로 영예를 돌렸다고 말하고 있지만(루가 19,38; 요한 12,13), 이 사건은 모두한테 왕의 입성으로 다루어진다.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한테 이것은 왕에게 드리는 참된 존경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왕권에 대한 빌라도의 법정심문을 요한은 더욱 폭넓게 공들여 작성하였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8,36-37).

 

소송 중의 이러한 왕권 선언에 대해 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른 일화로 응답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고의로 왕권을 새기는 동기가 되는 것으로, 다시 한번 빌라도 앞에서 발생한다.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 유다인들의 대사제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유다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다인의 왕이라고 써붙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빌라도는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 하고 거절하였다”(요한 19,19-22).

 

빌라도는 다만 유다인들한테 심술을 부리려고 이렇게 말하였는가? 아니면 그날의 사건 이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왕다운 품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는가?

 

요한 복음에서는 이 두 가지 재판 장면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사실을 소개하는 방법이 덜 세심하기 때문에 번역의 다양성 안에서 조금은 퇴색한 사건이고, 독자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충분히 그리고 올바른 심문 뒤에 빌라도는 예수의 무고함을 깨닫고는 예수를 자유롭게 풀어줄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를 눈치 챈 유다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요한 19,12). 그러한 외침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도록 하였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 리토스트로토스라 하는 자리에 올라가 자기 재판관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가빠타’라고 하는데 ‘돌 깔아놓은 자리’라는 뜻이다. 그날은 과월절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시쯤이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을 둘러보며 ‘자, 여기 너희의 왕이 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19,13-14).

 

대부분의 번역서들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를 단죄하기 위해 법정에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보인다. 실제로 공식법정은 관저 안에 있었고, 심문 중에 빌라도는 분노하는 사람들과 안에 있는 법정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갔다. 게다가 리토스트로토스에 선 빌라도의 입에서 선고가 나오지 않았고, 단순히 “보라, 너희의 왕을.”이라는 신랄한 조소가 나왔다. 그는 이 조소를 최대로 밀어붙이면서 예수를 잠시 동안 법정에, 즉 비공식적인 왕좌에 앉도록 한 것일까?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관사가 빠져있고, 법정 또는 다른 어떤 자리로 해석하는 게 더욱 논리적일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발로 군중들의 광란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너희의 왕을 나더러 십자가형에 처하란 말이냐?’ 하고 말하자 대사제들은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밖에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9,15-16).

 

어쨌든 예수께서는 잠시 왕좌에 앉았고, 잠시 동안 군중은 성지주일의 장엄한 입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상황은 지나치게 달랐고 완고했다. 증오의 대상인 빌라도의 조롱은 또한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구경꾼들이 한 편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 왕좌에 오른 왕은 참석한 군중한테 배척당했다.

 

요한의 수난 이야기에는 예수의 왕권의 절정을 표현하는, 법정에 앉은 왕에 대한 묘사가 없다. 이야기는 어떤 점진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결론은 십자가의 왕좌에 오른 왕의 고양(高揚)이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 3,14). 그리고 다른 데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요한 12,32-33). 이 숭고하고 비범한 왕좌 위에는 빌라도가 쓰게 했고, 하나의 선언으로 세기에 걸쳐 기록으로 남아있는 칭호가 달렸다.

 

그러나 군중은 이 왕좌를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그러한 기회에도 그분을 배척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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