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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8 조회수3,094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부활

 

미사 전례에서 신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고”라는 말로 고백한다. 신앙고백의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기록 가운데 하나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56년에 이 편지를 쓴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같은 형식을 사용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자신이 그보다 전에 믿었던 사도들로부터 받은 제안을 사용한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 사실입니다”(1고린 15,3-4). 따라서 신경의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된 우리 그리스도교 교의의 하나다. 그것은 바오로의 출현 전에도 있었고 사도행전과 상응하는, 사도들의 설교와 첫 번째 제자들의 신앙의 첫째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짤막한 구절로 모든 그리스도교 세대는 그들의 신앙의 근본적인 신비 가운데 하나, 즉 우리 미래의 부활을 고백했다.

 

지난 세기에 회의적인 비판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기 시작했을 때, 신앙은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로 부활의 사실을 제시하였다. 성서해석과 신앙설교에도 그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관심은 사실의 실재에 대해서, 그다지 말하지 않는 결정적인 진리의 내용과 가치에 더 돌려진다. 따라서 어쩌면 부활의 순수한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한 것 같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적어도 세부사항들에서, 순수한 역사적 자료로 확정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어느 정도 기꺼이 말한다. 사실 문제의 사건은 밤의 암흑 속에서, 봉인된 동굴무덤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관찰된 것이고, 부활의 결과였다. 허둥대는 병사들, 굴려진 바위, 빈 무덤, 시체를 썼던 아마포….

 

부활에 대한 참된 보고는 천상의 사절들로부터, 빈 무덤 옆에서 지키고 있었고 거기서 첫 번째 방문자들, 예수를 따르는 여인들에게 응답해 준 천사들로부터 전해진다. 사도들은 아무도 그 사절들을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제자들에게 일어난 어려움은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명의 대화에서도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계시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루가 24,22-23).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확신을 주는 입증은 자연히 살아나신 주님의 출현이다. 그러나 이 출현사실에 어떤 세부사항들이 연결되고, 그로부터 입증하는 힘은 조금 감소되고, 반면에 부활의 신비로운 특성은 분명하게 강화된다.

 

부활하신 분은 그분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막달라 여자 마리아, 게파, 열두 제자, 그리고 5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 여기에서부터 부활하신 분을 보기 위한 어떤 준비, 나아가 어떤 믿음이 필수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아니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듯이 다만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첫 순간에 동산지기와 마주친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돈호법을 쓴다. 다만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놀라워하고, 어떤 일에 대해 의심하나, 빵을 잘라주실 때에야 그분을 알아본다. 베드로와 요한은 새벽의 여명에 바닷가에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기적의 물고기를 배에 끌어올릴 때에야 그분이 누구신지 이해한다.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 번째 은총은 이 신비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은총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9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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