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오순절, 언어의 기적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 사도신경 열두 항목에는 예수의 죽으심과 묻히심에 대한 언급 뒤에 다음과 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세 가지 진리가 따라 나온다.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을 다룬다는 사실과 관련을 지을 수 있다. 수난과 죽음의 고통 뒤에 하느님의 아들은 그 육신과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고, 거기서 성부 오른편에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셨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오른편에’라는 이 표현을 글자가 뜻하는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은유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쉽게 깨닫는다. 선성(神性)에서는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 화법(話法)은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영광받으심에 대한 인간적인 표현으로 바로 시편 110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이러한 표현에서 공간적인 묘사를 상상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교의를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에 대한 두 번째 묘사에서도 우리는 공간적 움직임의 문제가 있는지 자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에 대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몇 가지 표현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하늘로 올라감 또는 오름이라고 말하고. 올라감이라는 말을 간결한 전통적 표현으로 이해하며, 이 모든 문구에는 올라가는 움직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로 곧이곧대로 움직임이나 올라간다는 구체적 이해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양(高揚)과 그분의 영광받으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루가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특징적인 다른 용어들로 묘사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다음 사도들이 보는 가운데 위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구름이 그분을 감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예수께서 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그들 곁에 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는, 그분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사도 1,9-11). 루가는 ‘가시다, 위로 올라가시다, 하늘로 가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화가로서 올라가는 움직임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끄집어낼 수 없다. 성서의 몇몇 단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확인시켜 준다. 루가 복음 24장 51절을 보면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들로부터 떠나가시었다. 그리고 하늘로 이끌리어 올라가셨다.”고 되어있다. 마르코는 그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모든 것을 짤막하게 요약한다. “그리하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16,19). 다른 본문에서는 오히려 영광받으심의 요소가 고대 그리스도교 찬가로 나타난다. “그분은 만민에게 알려졌도다. 세상이 그분을 믿었으며 그분은 영광 가운데 높여졌도다”(1디모 3,16). 오늘날 이 본문들에 대해서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희생시킴으로써 승천의 은유적 의미, 즉 고양과 천상 영광 가운데 높여지심이 더 강조되어서는 안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어떤 해석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이 암시된 유일한 일은 아니다, 즉 참으로 볼 수 있는 승천이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다. 예컨대 부활 후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에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있었던 예수의 많은 발현으로부터 추론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발현 뒤에 언제나 예수께서는 사라지셨다. 세상으로부터 떠나가신 이것은 일종의 승천이다. 그러한 반복적인 발현과 사라지심에서, 사도행전에 따르면 부활 후 40일째에 일어난 결정적이고 영광스러운 고별과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따라서 마지막 고별의 장엄하고 축제적인 특성을, 사실에 공간적인 색채와 고유한 전망을 제공한 화가 루가의 탓으로 돌리는 해석들이 있다. 그러한 가정의 입증으로 루가가 구약성서의 문학에서 빌려온 요소들, 즉 40일, 산, 구름과 설명하러 온 천사라는 용어들이 지적된다. 사도행전처럼 루가의 역사적인 작품이 ‘자유로운 구상’으로 착수되었다는 가능성은 조금밖에 없다. 볼 수 없는 영광받으심의 어떤 표명인,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영광받으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훨씬 더 그럴듯하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 표명을 구약의 묘사 그리고 이미지와 밀착시키는 것은 계시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러한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을 그렇게 고안한 것은 루가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오순절의 언어 기적 사도행전은 젊은 교회의 전파와 팽창하는 힘에 대해 묘사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성장이 성령의 볼 수 없는 작용 덕분이므로 사도행전은 성령의 활동을 묘사하는 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따라서 루가의 복음은 하느님 아들의 육화(肉化)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분의 생애를 기록으로 정착시키고, 사도행전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해 은혜로운 활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제3위에 대해 묘사한다. 책의 서두에 있는 예수의 승천과 마티아를 열두 번째 사도로 뽑는 일에 대한 묘사는 오순절의 위대한 사건으로 들어가는 도입부이다. “내가 물러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롭습니다. 사실 내가 물러가지 않으면 협조자가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면 여러분에게 그분을 보내겠습니다.”(요한 16,7)는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사도들은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성령의 오심으로 루가의 두 번째 책의 으뜸 주제가 시작된다. 오순절 사건은 파라클리토 성령에 대한 묘사와 표명에 결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최후의 만찬 방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부는 세찬 바람 소리를 들었고 각자의 머리 위에 불 같은 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세찬 바람과 ‘성령’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 부합한다. 그리고 불 같은 혀는 성령의 활동을 함축한다. 실제로 성령은 불길처럼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땅 끝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 가운데서 말씀을 통하여 퍼질 것이다. 따라서 불 같은 혀는 성령께서 사도들 각자에게 주시는 것의 상징이었다. 즉 말씀을 통하여 어디서든지 드러내야 하는 내적 정열이다. 실제로 정열로 충만된 열둘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세찬 바람 소리를 듣고 몰려온 군중은, 우리에게는 젊은 교회의 언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유례없는 오순절 사건의 증인이 되었다. 루가의 짤막한 보고로는 열둘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일어난 일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설명은 이미 고대에 여러 장식으로 꾸며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사도들은 누구나 오순절의 기적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 영역에서 나중에 필요로 한 언어를 말했다는 설명이 지지받았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언어의 선물은 지속적인 선물, 각 사도 안에 부어진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더욱 엄밀한 조사에 따르면 그러한 효과는 어떤 식으로도 드러나지 않고, 그것은 게다가 훨씬 나중에 이루어진 설명이다. 다른 저자들은 망설이면서도 사도들이 일반적으로 언어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한층 단순하게 설명한다. 즉 사도들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들었고(사도 2,6), 따라서 기적적인 특성은 사도들이 말하는 데서 찾아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어떤 해석학자들은 언어의 기적 대신에 청력(聽力)의 기적이라고 한다. 다른 주석가들은 주위에 있던 이들의 반응 - “새 포도주에 흠뻑 취했군!” - 에 강조를 둔다. 취함에 대한 그러한 인상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으로 야기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한 열둘의 황홀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황홀경은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한테는 잘 이해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술에 취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오순절 기적을 설명하는 두 개의 마지막 시도는, 이야기의 다른 요소들과 조화를 썩 잘 이루지만,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다른 성서 자료들과 충돌한다는 것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본문에서 성서는 언어의 기적을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청력의 기적이나 황홀경의 용약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 따라서 성 바오로는 언어의 선물을 받은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거나 외국적인 것일지라도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비그리스인, 외국인과 비교한다(1고린 14,11). 사도들에게 하신 예수의 마지막 약속 -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곧 내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마르 16,17) - 은 그 밖의 것을 담고 있다. 이 약속에 관련된 집단이 있다면 바로 사도단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결국 거기에 관련되었다면, 이는 확실히 오순절 축제 때에 일어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가가 언어로 말한다고 언급한 것(사도 2,4)과 주위에 있던 이들이 놀라움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보다시피 모두 갈릴래아인들이 아닌가!”(사도 2,7) 하고 물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갈릴래아인들에게는 비범하게 들리는 언어로 말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정신착란과 격리의 원천으로 보였던 언어의 분열은 사도행전에서 상호이해의 원인과 참된 일치의 시작이 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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