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열광적이고 잔인한 박해자 다마스커스 문 앞에서 우리는 자동차로 레바논 맞은편 산맥에서 내려와 다마스커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파르고 경사진 길을 거의 지나고 서서히 사막 쪽을 향해 내려가는 곧은길을 만나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우리 차는 길의 왼편으로 기울어지면서 옆에 있던 부드러운 보호벽에 파묻혔다. 잠시 뒤에 우리는 땅에 떨어졌다. 차 옆에서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앞바퀴가 빵꾸 났다는 얘기였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바오로를 생각했다. 그 역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갑자기 ‘돌발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말 위에서 난폭하게 땅으로 대동댕이쳐진 그는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아무도 자연스러운 설명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마스커스 시(市)는 아직까지 바오로 사도에 대한 몇 가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가 말에서 떨어진 뒤 며칠 동안 머물렀던 ‘곧은 거리’가 있다. 거기에는 아직도 하늘의 현시를 본 뒤 바오로를 제자들 집단에 받아들인 그리스도인 아나니아의 작은 집이 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바오로가 광주리에 담겨 도망갈 때 통과했던 ‘들창문’이 나있는 도시의 아주 오래 된 성벽이 있다(사도 9,11-25; 2고린 11,33). 갖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바오로 생애의 다양한 순간들을 기억하며 이 도시를 찾는 그리스도교 방문객들의 마음에 밀려든다. 그러나 그의 생애 중 가장 신비스럽고 기억할 만한 순간은 사막의 초입인 다마스커스의 문 가까이 있는 그 고독한 장소에서 그가 그리스도교의 박해자에서 인류의 사도가 되었다는 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장소 설정에 대해, 즉 그 유명한 사건이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사울인 그에게 실증된 믿기 어려운 변화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영성생활에 조금이라도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오로가 그랬듯이, 열광적이고 잔인한 박해자에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은총으로 풍부한 현시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해석학자도 확신에 찬 바리사이인의 회개가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바오로는 자기 자신을 “우리 조상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서 엄격한”(사도 22,3; 갈라 1,14) 위대한 가믈리엘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 가운데 자리를 잡았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명백하고 위대한 기적들 앞에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린 그와 같은 바라사이파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마음을 닫고, 마음에 끝없이 미움을 키우고 있었으며, 예수를 따르고 본받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심어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그들의 부추김을 받은 백성과 함께 예수의 죽음을 요청하고 살인자 바랍바의 석방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들, 가장 열광적이고 나아가 가장 “살기를 띠고 위협적인”(사도 9,1) 이들 가운데 하나가 다마스커스 문 앞에서 예수와 만났다. 그러나 그는 무장해제되어 땅에 내던져졌다. 아무런 저항도 소용없게 된 오만한 바리사이인은 항복한 채 겸손되이 묻는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사도 22,10). 한 바리사이인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회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게다가 바오로에게 내적으로 일어난 회개는 어떠한 것인가! 그는 눈이 멀어 비틀거리며 그의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로 들어가 “사흘 동안 머물면서 앞을 못 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9). 그 뒤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 은총을 받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거기서 다마스커스로 돌아오게 된다(사도 9,17).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갈라 1,18-20). 3년 동안 바오로는 자기 자신과 싸웠다. 아나니아의 방문은 그 시작으로 볼 수 있고, 게파와 야고보를 만난 것은 이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는 결말이다. 아라비아 사막의 고독 가운데 그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복음에 대해 묵상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과 특히 베드로가 유다 율법의 규정을 따르고자 한 반면에(갈라 2,12-13), 바오로는 한때 율법에 그토록 완고하게 충실했으면서도 단호하게 그것을 끊어버리려고 하였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갈라 2,16). 바오로의 선택은 이처럼 단호하고 결정적이어서 이러한 생각은 당연하게 ‘바오로의 복음’이라고 불리고, 바오로 자신은 예수의 이상을 율법과 유다이즘에서 명확하게 분리시킨 사도로 불린다.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은 솔로몬 행각에서(사도 5,12) 더 이상 모임을 가질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유다의 종교 공동체 안의 한 분파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었다. 바오로의 경우, 다마스커스 문 앞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방어할 때 가끔 이 사실에 호소한다(사도 22,4-18; 26,12-18). 자신의 사도로서 근거를 거기에서 일어났던 발현에 두고(1고린 9,1) 그의 복음은 전적으로 다마스커스에서 3년 동안 풍부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나아가 어떤 해석학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바오로의 개념이 오로지 다마스커스의 현시로 설명될 수 있으며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는 예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사도행전 저자의 경우, 다마스커스의 사건은 그리스도교에 유다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 더욱 멀리까지 가는 지평을 제공했다. 이 때문에 그의 책 두 번째 부분을 바오로의 회개를 이야기한 후 팔레스티나 교회의 상태에 관한 종합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그러는 동안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 들어선 교회는 안정이 되어 터전을 튼튼히 잡았고 주를 두려워하며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사도 9,31).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