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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이방인 세계를 향한 문, 안티오키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3 조회수2,47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이방인 세계를 향한 문,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가 유다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 팔레스티나를 벗어났을 때 안티오키아라는 도시가 즉각 지평에 떠올랐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도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사도 11,19). 처음에는 사도적인 접촉과 활동이 히브리 국가에 제한되었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방인들의 회개에 대한 문제를 베드로가 결정했다고 언급한 뒤 안티오키아에서 이교도들의 회개를 언급하는 데는 몇 마디의 말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신도들 중에는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께서 그들을 보살피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사도 11,20-21).

 

거기에서는 신자 집단이 잘 조직되었고 아마도 많은 수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사도 11,26)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리스 세계와 첫 번째 접촉이었던 것이다.

 

비록 안티오키아 교회가 고유한 특징을 드러냈다 할지라도 예루살렘의 어머니 교회와 긴밀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 예루살렘에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사절로 파견되었다(사도 11,22) 여기에 즉각 다른 이들이 따랐다. “그 무렵 예언자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사도 11,27). 두 교회 사이의 관계는 클라우디오 황제 치하에서 팔레스티나가 궁핍을 겪고 있을 때 안티오키아가 가졌던 관심이 보여주듯이, 자라나고 강화되었다 그때 제자들은 각기 그 능력에 따라 유다에 거주하는 형제들에게 원조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사도 11,28-29).

 

그러나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의 잦은 접촉은 오해와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교에서 회개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때때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인들과는 지나치게 다른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유한 견해를 따르고 있었다. 자연히 여기서 사고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 유다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사도 15,1-2).

 

예루살렘과 유다는 결정적이었다. 신앙 자체가 성도(聖都)에서 왔듯이 이 신앙개조(信仰個條)에 대해서도 성도의 응답을 기다렸다. 어머니 교회의 응답은 안티오키아의 감정에 확신을 심어주었고, 따라서 이 도시공동체는 이교도들에 대한 신앙의 개방을 한꺼번에 가능하게 했다. 이로써 안티오키아는 팔레스티나 밖에서 교두보가 되었고 이방인 세계를 향한 문이 되었다.

 

안티오키아에 대한 이 첫 번째 활동에서 두드러진 이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였다.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의 대표로 안티오키아에 왔다. 그 뒤 그는 바오로를 데려오기 위해 다르소로 갔고, 그를 찾아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들은 일년 내내 그곳 교회 신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사도 11,25-26). 그러므로 그 둘은 이방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다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둘 다 안티오키아에서 고유한 선교소명을 발견하였다.

 

주님께 드리는 종교예식 동안에, 즉 단식 때 성령께서 그들을 지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나서 그들에게 안수를 해주고 떠나 보냈다”(사도 13,2-3).

 

안티오키아에서 떠난 첫 번째 선교사들은 마치 안티오키아가 그들의 근거지인 양 언제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안티오키아는 원래 온 교회가 두 사도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빌어주며 전도의 임무를 맡겨 내보냈던 곳인데 지금 그들은 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사도 14,26).

 

예루살렘이 유다와 사마리아를 위해 했던 몫을 안티오키아는 지중해의 동쪽 유역을 위해 하였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는 지중해의 서쪽 유역을 위해 예루살렘과 비슷한 역할을 할 중심지, 로마를 세울 자신의 꿈을 표현한다.

 

그는 그리스에서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를 두고 여러분을 찾아가려고 별러온 나는 이제 이 지방에서 할 일을 다 끝냈기 때문에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잠시나마 함께 지내면서 즐거움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곳으로 가게 되었으면 합니다”(로마 15,23-24). 이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중심지들 -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로마 - 이 더욱 분명하게 확립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세 중심지를 자연스럽고도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연결시킨다. 성서 본문은 다만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전한다(사도 12,17). 그러나 베드로는 결정적으로 로마에 자리잡기 전에 자신의 주교좌를 안티오키아에 정하였다. 새로운 전례는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역전통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본질적인 진리는 보존되었고 더욱 훌륭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성서적 발전은 바로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그리고 로마의 이름으로 정확하고 합당하게 정착되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6년 10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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