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최초의 그리스도교 섬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섬들이 구약의 인간에게 항상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해안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재화를 가득 싣고 항구를 떠나 섬들을 항해하는 선박들을 마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섬에서 나오는 상품들 앞에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했다. 산악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땅의 재화들을 싣고 바다를 항해하기도 하고, 바다 저 멀리 매력과 신비를 가득 안고 있는 다른 나라 선박들과 교차하기도 하는 자기 나라 선박들을 산에서 자만심을 가지고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선각자들도 그 멀리 떨어진 땅의 매력을 맛보았고 특히 섬들을 사건에 대한 그들의 영상에, 메시아적 행복에 결부시켰다.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부족들아, 정신차려 들어라”(이사 49,1).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지구 위 구석구석에서 찬양소리 울려퍼지게 하여라. 바다와 바다에 가득한 물고기들아, 소리를 질러라. 섬과 섬에 사는 사람들아, 환성을 올려라”(이사 42,10). 팔레스티나에서 처음으로 다다를 수 있는 섬은 구리의 섬 키프로스다. 따라서 키프로스가 물질적 재화에 있어서도 근동으로부터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성지의 정신적 재화에 참여하는 데도 첫째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카베오 전쟁 때 많은 유다인들은 키프로스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많은 신도들이 키프로스로 이주해서 거기에 그리스도교를 옮겼고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따라서 이렇게 불편한 시기부터 키프로스의 그리스도교인들과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유대가 있었다. 주로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인들 사이의 사도직에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신도들 중에는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20). 게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키프로스에 있는 유다인들이 확실히 원주민과 접촉했고 알고 지냈다는 점이다. 이교도들 가운데 주요 선교사 중 하나는 키프로스인 바르나바였다. 그는 첫 세대 그리스도교인에 속해 있었고 처음부터 영웅적 활동으로 두드러졌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 다 바쳤다”(사도 4,36-37). 바로 그 바르나바는 그리스도교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접촉과 대립이 있었을 때 안티오키아에 파견된 예루살렘의 사절이었다(사도 11,22). 그는 시야가 넓고 - 단지 키프로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 사건에 관해 분명한 시각을 지닌 출중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오게 되었다”(사도 11,24). 따라서 그는 두 교회 사이의 접촉과 다양한 범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체계화했고 다르소에서 바오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려갔으며(사도 11,26) 그와 함께 고대세계에서 사도직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선교여행은 바로 키프로스를 향해 조직되었다. 바르나바, 바오로 그리고 바르나바의 조카 요한 마르코 등 세 사람의 동료는 셀류기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의 동쪽 해안에 닿아 살라미스에서 하선했다. 바르나바에게는 자기 조국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되었고, 바오로에게는 전적으로 새로운 체험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선교사로서 바오로는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성공하였다. 섬을 향한 여행은 사도행전에 간소하게 묘사된다. 단지 세 명이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선포하였고(사도 13,5) 서부 지역의 바포에 이르렀다(13,6)고 언급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유다의 거짓 예언자와 함께 있던 로마인 지방 총독이 새로운 교리에 대해 관심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말고는 그리스인들의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실제로 그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였다”(사도 13,7). 그때 바오로와 거짓 예언자 사이에 작은 충돌(사소한 말다툼)이 전개되었고, 그 거짓 예언자가 바오로에 의해 눈이 머는 벌을 받게 됨으로써 총독 세르지오 바오로에게 확신을 주게 되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총독은 주님께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어 신도가 되었다”(사도 13,12). 이를 계기로 바오로는 이 여행과 뒤따르는 다른 여행에서 선교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몇 해 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두 번째 사도여행을 시작하려 할 때 그들 사이에 논쟁이 생겼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 하는 요한을 데려가려 했으나 바오로는 밤필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동료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심한 ‘언쟁’ 끝에 그들은 헤어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 렸다”(사도 15,37-39). 키프로스에 대한 이러한 선교여행과 바르나바와 마르코가 거기서 활동한 것에 대해서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외경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키프로스가 그리스도교 섬이 되었고 몇 세기에 걸친 이슬람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교를 보존했다는 것을 안다. 오늘날에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도교는 분명하게 현존하며 제일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6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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