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아테네에 간 바오로 아테네의 현대적이고 활기 넘치는 시(市) 중심부에 가까이 자리한, 고대에 대한 세 가지 무언의 증거물은 더 낫게 표현하면, 그리스의 영원한 예술, 그 백성의 유형(有形)의 숭고한 문화이며 그리스도교와 첫 번째 만남에 대한 증거들이다. 그것은 폐허가 된 장대한 신전과 함께 있는 아크로폴리스, 한때 생활이 집중되었던 아고라(시장), 그리고 바오로가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아레오파고이다.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테오를 기다리던 바오로는 ‘그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히브리인들과 하느님을 믿는 이들과 토론을 벌이는데 시간을 보냈고, 날마다 아고라에 나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을 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은 바오로와 토론을 해보고는 ‘이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라고 말하였다”(사도 17,16-18). 바오로는 전적으로 이교적인 대도시에서 아직도 손으로 더듬으며 애쓰는 선교사였다. 다시 말해 그는 정확한 출발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시장의 광장에서 우연하게라도 접촉하려고 애썼다. 자연히 광장에는 다양한 학파의 철학자들이 배회하고 있었고, 바오로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그들은 그를 경멸하듯이 떠버리, 반문맹인, 허풍쟁이라고 하였으며, 예수와 부활에 대해 유창한 말로 장난스럽게 평하였다. 어쨌든 군중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으나, 시끄러운 광장이 정상적인 회개를 위한 적합한 장소가 못 된다는 사실을 그는 곧 깨달았다.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수 없겠소? 우리가 듣기에 당신은 생소한 말을 하는데 어디 그 설명을 들어봅시다’”(사도 17,19-20). 아레오파고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에게서 이름을 따온 암석 끝에 위치한 작은 공간이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의 정면에 있는 평범한 바위에 지나지 않는다. 비유와 말마디로 시장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철학자들은 바오로와 함께 바위로 올라갔다. 아레오파고 정상에서 보면 시장의 광장뿐 아니라 성전과 아크로폴리스의 장엄한 건물과 그 아래로 광대한 도시의 경탄할 만한 시야가 펼쳐진다. 바오로는 아레오파고 중앙에 우뚝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한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사도 17,22-23). 이어서 사도행전에는 ‘아레오파고의 연설’이라고 하는 바오로의 연설이 나오고 이것으로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언급하는 다른 연설들의 경우보다 이 연설이 더 진정 바오로의 것인지 아니면 루가의 것인지를 묻게 한다. 실제로 이것은 말씀의 선택과 기간의 설정이 아주 잘되어 있다. 전통적인 해설에서는 설교 전체가 바오로의 것이며, 그리스도교 설교에서 장소와 인물을 잘 배치하고 있는 좋은 예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바오로의 진정성에 대한 반론은 매우 크게 제기되며, 상당수의 요소들은 그리스인 루가를 생각하게 한다. 예컨대, 이 연설에서는 분노, 의화, 직무, 율법과 비교되는 믿음, 주님의 재림과 같은 바오로의 주제가 결여되어 있다. 계시없이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전개가 여기서는 로마서에서처럼 다른 논법을 가지고 있어, 어렵게 바오로의 작품으로 여기게 한다. 언어의 특성, 절의 느낌, 문장의 구조, 구약성서의 모방은 더욱 루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이 연설에서 나타나는 인용들도 정확하지는 않다. 알지 못하는 신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지 못하는 많은 신들을 예배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유일신에 대한 연설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이 연설은 실제로 바오로가 만났던 철학자들의 세련된 개념이 아니라 백성의 종교적 개념에 더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연설의 주제는 유다-그리스도교적이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장차 오실 재판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도신경의 핵심과 일치한다. 이러한 요약은 특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에 나오는데, 전적으로 유다 규범과는 명백히 달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적임에 틀림없다. 루가는 이 주제를 신생 교회의 종교적 유산에서 취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루가가 이 그리스도교적 주제에 자신의 색채, 자신의 전망을 부여하고 유럽인들에게 아주 적합한 개념인 그리스적 개념과 접촉을 시도하고 적응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구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의 것이다.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사도 17,27-28). 영혼을 깊이 압도하는 이러한 숙고는 회개로 초대하는 신약성서의 문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러나 대부분에게 이것은 그들 지나치게 강한 요구였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사도 17,34). 이들이 고대 유럽의 문화적으로 최고 중심부에 있는 첫 번째 그리스도교인들의 집단이었다. 오늘날 우리 문화의 중심에서는 종종 아레오파고의 사건이 반복된다. 그리스도교 교의는 그 시대에 부응하는 용어들과 개념으로 세밀하게 다듬어지고 깊이 연구되는데, 이는 현대 정신에 맞는 적합한 행동 양식이다. 그럼에도 구원은 항상,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완성된다. 덧붙여서 이 완성을 위해 바오로 자신은 지식인들을 매료시키고 회개시키려고 웅변술과 인간적인 지혜를 보여주면서, 문자적, 철학적으로 한층 다듬어진 다양한 연설을 시도하였다고 어떤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것은 ‘인간적인 지혜’ ‘고상한 말’로 설교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말’ ‘천상의 지혜’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고린 2,2) ‘세상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로 설교하는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