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사도 바오로 그리스도의 증인 바오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오로의 경탄할 만한 삶은 사실적이고 진실한 의미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시작되었다. 때때로 그는 개종 이전의 일, 곧 다르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교육받았고 그곳에서 가믈리엘의 제자였다는 것, 유다 율법을 지키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다는 것(사도 22,3-4). 그리고 이 열성 때문에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것(사도 26,9-11)을 언급한다. 이 모든 사실은 나중에 그에게 혐오감과 후회를 안겨주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러한 미움과 박해 중에 그는 신비스럽게 번쩍이는 그분의 발현으로 예기치 않게 그리스도께 붙잡혔고, 이것은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그리고 사도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일생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씀이 강하게 울려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꾼으로 삼아 네가 오늘 나를 본 사실과 또 장차 너에게 보여줄 일들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서 구해내겠다. 그리고 다시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겠다”(사도 26,16-18). 이러한 임무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도 그의 영혼 속에 남게 되었다. 곧, 그가 들은 말씀 속에 남았고, 그의 위대하고도 신비스러운 삶 전체에서 빛났다. “사울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대사제에게 갔다”(사도 9,1). 그러나 하늘에서 번갯불이 갑자기 그에게 번쩍였고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사도 9,3-5). 그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을 생각했고, 박해받는 이들이 주님과 동일시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 동일시는 미래의 그의 삶 전체에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구실을 하게 된다. 모든 교회를 걱정할 때(2고린 11,28) 주님께서는 항상 그 앞에 계셨다. 그는 일을 할 때나 괴로울 때나 다마스커스에서 그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임무를 생각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필립 1,20). 가장 오래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차지하여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관하여 기록했다. 다마스커스에서 그는 주님과 두 번째 만나려는 열망, 곧 그가 마케도니아의 신생 그리스도인들과 종종 얘기했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에 관해서 누차 일러둔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2데살 2,5) 이 두 통의 편지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열망을 모든 교우에게 전하려고 새롭게 말한다. “다음으로는 그때 살아 남아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데살 4,17-18). 이 위대한 두 통의 편지에서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늘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은총으로 믿음의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신다. 이미 언급했듯이, 율법을 바오로만큼 열성적으로 지킨 이가 없었는데, 이러한 열성이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노력이 없어도 인간 삶 안에 예기치 않게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것을 그만큼 체험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대하시는 소리는 분명히 은총, 바로 이 은총뿐이며,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양한 은유 속에 이 진리를 단언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관계는 하느님의 업적이며, 이 사랑은 인간의 행위보다 앞선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4). 고린토 교회에 보낸 위대한 두 통의 긴 편지에서 바오로는 교우들 사이에 그리고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1고린 6,15)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1고린 8,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고린 12,12).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있습니다”(1고린 12,27).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교리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의 자연스러운 확대이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던 날(사도 22장) 그리고 로마를 향해 승선하기 바로 전에 바오로는 다마스커스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발현을 길게 이야기하였으며, 몇 해 동안의 감옥생활 그리고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계속 그 사건과 그리스도의 위격을 심사숙고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들은 그 설명을 이 마지막 편지들에서 찾는다. 그리스도는 다만 바오로의 생애나 그가 세운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지배하는 분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의 사고를 지배하시는 분이며, 우주의 주님이 되셨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6-17). 다마스커스 발현 순간부터 바오로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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