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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판관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4,00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판관기

 

 

판관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부터(기원전 약 1225년) 왕정(王政)이 탄생하기까지(기원전 약 1025년)의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책이다. 판관기에 의하면 이 사이의 기간은 혼돈의 시대였으며 이스라엘의 동맹 체제는 끊임없는 투쟁을 겪어야 했다. 이 시대는 “판관들이 지배한 시대”(룻기 1,1)였다. 판관기는 역사적 문서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문학으로서 그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선택된 영웅들 혹은 “판관들”의 활동 안에서 역사하시는 야훼의 영을 강조하고 있다.

 

 

판관이란

 

전기 예언서의 두 번째 책에 “판관기”(判官記)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책이 “판관들”(Judges)이라 불리운 이스라엘의 주된 영도자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분을 지칭하는 “판관” 혹은 “판관들”이라는 명사는 이 책에서 단 두 가지 점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그것은 옙타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과 암몬족 사이의 전쟁에 있어서 ‘재판’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야훼에 관해 한번 사용되었다(1l,27). 또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야훼께서 세운 구제자들을 소개하는 부분에 여섯 번 사용되고 있다.

 

판관기 안에서 어떤 영웅도 특별히 “판관”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으나, 여덟 명이 “판관했다”(judged)고 한다. 즉 오드니엘(3, 10), 돌라(10,1-2), 야이르(10,3), 입다(12,7), 입산(12,8-9), 엘론(12,11), 압돈(12,13-14) 그리고 삼손(15,20; 16,31)이 바로 그들이다. 이 모든 경우에 “판관했다”라는 용어의 의미는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원수로부터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 같이 판관들은 법적인 고문(顧問)이라기보다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야훼의 영에 의해 부추겨지는 투사 혹은 영웅들이었다. 드보라의 경우에만 사용된 동사가 두 가지 뜻을 다 내포하고 있는데(4,4), “이스라엘 백성이 재판 때문에 그녀에게 갔다.”(4,5)는 말은 그녀가 법적인 결정 혹은 판단의 가능을 행사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사용된 용어는 이들 판관들이 구제자로서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지만,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부터 수년 동안(6년부터 40년 간) “재판했다”고 보통 표현된다. 입다의 경우에는 다른 표현, 즉 “통치자”(10, 18)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는 원수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계속 통치할 것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각 판관은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권을 행사했다. 더욱이 판관들은 ‘통치자’들로 간주되었다.

 

 

판관상(判官像)

 

판관기 2장 6절 이하에 판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판관은 계승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야훼로부터 파견을 받은 구원자로서 등장한다. 판관들은 자기들이 어떤 정신적인 계승권을 받았다고 선포하는 일이 없이 불연속적으로 나타난다.

 

b) 판관의 출현은 그들이 어떤 인간적인 용맹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께서 고통 중에서 당신에게 돌아오는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셨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판관들을 ‘영웅’으로 숭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이스라엘의 어려움을 돌보고자 하시는 ‘야훼의 도구’로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 “야훼께서는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셨다”(2,16). 이 ‘구제자’를 통하여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원조자요 구원자로서 그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다.

 

c) 판관들은 야훼의 확고한 ‘명령’과 결부되어 있다.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판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판관들은 생존하는 동안 그 백성을 훈계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죽자마자 백성은 다시 불순종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판관들의 모습에서 두 가지의 뚜렷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판관은 어떠한 ‘직위’도 갖지 않은 채 다만 야훼께로부터 ‘파견’ 받은 자로서 돌연히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훼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구원 의지(救援意志)가 그들의 불연속성(不連績性)을 통하여 표현되는 셈이다. 둘째, 이들의 출현을 통하여 ‘율법’을 다시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이 야훼의 성실하심과 그분의 자비를 누리는 것은 그분의 계명(그분만을 경배하라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과 아주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세습적이던 왕조와는 달리 판관직(判官職)은 비세습적이었고, 야훼의 영이 내린 사람이면 누구나 판관으로 나섰다. 따라서 판관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하느님의 ‘카리스마’ 또는 영적(靈的)인 능력이 주어져서 그는 부족동맹(部族同盟)의 우두머리가 될 자질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았다”(직역하면 “기드온을 입혔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럼으로써 기드온은 자기 부족(部族)뿐만 아니라 이웃 부족에까지 권위를 띠게 되었다(6,34-35). 더욱 생생한 예는 전설적인 삼손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주님의 영이 갑자기 내리 덥쳐” 그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했다고 한다(14,6). 드보라 역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부족들을 소환하여 야훼의 이름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전쟁을 치렀다(45장). 이렇게 판관들의 권위는 그들이 야훼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입증해 주는 ‘야훼의 영’에서 온다. 그것은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그러한 권위이다. 즉 신왕(神王)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영을 내려 선정하신 ‘대리자’(代理者)를 통해 ‘직접’ 당신의 백성을 구제하고 영도(領導)해 나가신 것이다.

 

이렇게 판관기를 쓴 신명기계 저자는 어떠한 법칙에도 얽매어 있지 않으며 또한 야훼의 ‘주권 의지’(主權意志)와 분리할 수 없는 야훼의 ‘은총’을 판관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판관들의 의로움과 이스라엘의 타락 및 회개는, 판관기에 나타나 있는 이 고대의 구원사(판관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면에 카리스마적인 자발성의 요소가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신학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있는 구절에는 ‘야훼의 영’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 야훼의 영은 그분으로부터 인간(판관)에게 임하여 인간을 감동시키고 옷처럼 “입혀져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구원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다. 어떤 규칙적인 역사 체계에 구애를 받지 않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섭리 사상’(攝理思想)이 이 기록들을 지배하고 있다. 야훼는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구원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셨다. 야훼 하느님은 출애굽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어려운 형편을 못 본 체 않으시고 그들을 구해 내신 하느님이시라고 여기서 새로이 찬양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구성 및 내용

 

판관기는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점령의 확대를 다루고 있는 서론(1,1-2,5). (2) 책의 중심 부분에 대한 서론(2,6-3,6) 및 각 판관들에 대한 설화들의 모음(3,7-16,31). (3) 단의 부족 성소(聖所)의 기원에 대한 두 부록들(17-18장)과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의 죄스런 행위(19-21장).

 

이 세 부분 중에서 첫째 부분과 셋째 부분은 따로 분리해서 취급해야 한다. 판관기의 실제 부분은 중심 부분(각 판관들에 대한 설화)에 대한 서론 부분인 2장 6절-3장 6절과 그 중심 부분인 3장 7절-16장 31절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17-18장과 19-21장은 두 개의 보충 자료인데 같은 시기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판관기와 연결을 갖게 되었다. 1장 1절-2장 5절은 후에 판관기 서두에 첨부된 내용이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방법에 관해 여호수아서와는 다른 표현을 요약하고 있다.

 

판관기의 각 부분 내용을 상세히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I. 가나안 땅의 불완전한 정복(1,1-2,5)

 

1) 가나안 남부의 정복(1,1-21)

2) 베델 성 정복(1,22-26)

3) 정복되지 않은 지역들의 목록(1,27-36)

4) 계약을 깬 결과(2,1-5)

 

II. 판관들 시대의 이스라엘(2,6-16,31)

 

1) 판관들의 시대에 대한 서론(2,6-3,6)

2) 오드니엘과 메소포타미아의 구산리사다임(3,7-1l)

3) 에훗과 모압의 에글론(3,12-30)

4) 삼갈과 불레셋 사람들(3,31)

5) 드보라 및 바락과 가나안의 야빈 및 시스라(4,1-24)

6) 드보라의 노래(5,1-31)

7) 기드온과 미디안족(6,1-8,28)

8) 기드온의 만년(8,29-35)

9) 아비멜렉(9,1-57)

10) 소판관 돌라(10,1.2)

11) 소판관 야이르(10,3-5)

12) 입다와 암몬족(10,6-11,40)

13) 입다와 에브라임의 불평(12,1-7)

14) 소판관 입산(12,8-10)

15) 소판관 엘론(12,11.12)

16) 소판관 압돈(12,13-15)

17) 삼손과 불레셋족(13,1-16,31)

 

III. 부록(17,1-21,25)

 

1) 미가의 집안과 단 지파의 이주(17,1-18,31)

2) 기브아인들의 만행과 베냐민 사람들에 대한 처벌(19,1-21,25)

 

 

서론(1,1-2,5) : 가나안 땅의 부분 정복

 

판관기 1장은 완전한 하나의 책으로 보아야 한다. 주제에 있어서 1장에는 여호수아서와 비슷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여호수아서의 서술과는 아주 대조된다. 판관기 1장에 의하면 정복되지 않은 지역들이 많았다고 한다. 판관기의 제일 첫구절인 “여호수아가 죽은 뒤”라는 말은 판관기의 내용이 여호수아의 업적의 속편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분명히 판관기와 여호수아서의 끝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편집인의 시도이다.

 

판관기에 이러한 서론이 첨가된 것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땅 완전 정복 설화와 판관 시대 동안의 개개 지파들의 피나는 투쟁을 묘사하는 판관기 1장의 서술은 서로 대립된다. “……지파는 ……족(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다.”는 구절이 하나의 후렴처럼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가나안이 어떻게 정복되었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판관기 1장과 여호수아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의 정복 설화는 정복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단순화시킨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 참석한 연속적인 전쟁을 통하여 가나안 땅 전체를 정복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넌 후 모든 것이 신속하게 완성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판관기 1장에서는 여러 지파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다른 지역들에서 점차적으로 침입했고 단지 몇몇 지역에서만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의 후반부인 2장 1-5절은 이스라엘의 정복과 정착에 관한 종교적 의미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기사(記事)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요르단강을 건넌 후의 이스라엘의 첫 진지인 길갈(여호 4,19)에서 야훼의 천사가 “보김”으로 올라가서 행한 선언으로 되어 있다. 즉 정착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주민들과 계약을 맺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2절), 그래서 이들 주민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적들이 되며 그들의 신들은 이스라엘을 옭아매는 올무가 된다(3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백성들은 그 새로운 성소(聖所)를 보김(그 뜻은 “우는 이들”이며, 아마도 베델과 동일한 장소인 듯하다)이라 이름붙였다. 이같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러한 서론부를 통하여 중심부에서 “판관들”이 활동할 터전을 놓아 주고 있다.

 

 

신학적 해설(2,6-3,6)

 

책의 중심부에 대한 서론(2,6-3,6) 중에서 2장 11절-3장 6절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신학적 해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것(2,11-19)은 백성들의 배반, 그에 따른 처벌 그리고 그들의 구원에 대해 묘사한다. 하지만 구제자, 즉 판관의 죽음 이후 다시 배반 - 처벌 - 구원이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 형식은 영웅 설화의 신학적 구조(예컨대 3,12-15.30; 4,1-3.23)와는 다르다. 즉 후자는 회개하는 부차적인 요소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2장 11-19절의 해석은 더 근대의 것이고 야훼의 자비로운 행위로서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해석(2,20-3,6)은 이스라엘의 시험에 관해서인데, 이스라엘이 앞으로 겪을 일련의 위기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의 능숙성과 야훼의 계명들에 복종할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시험 기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판관기 이야기의 일반적인 주제는, 여호수아의 영도로 시작해서 삼손의 끝날까지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적 경험은 연속적인 단계들의 일련의 주기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영도자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야훼께⊂충실함⊃→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김으로써 야훼를 ⊂배반함⊃→야훼께서 적의 박해를 허용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처벌하심⊃→구원을 향한 백성들의 ⊂부르짖음⊃→야훼께서 구원자인 ⊂판관⊃을 파견하심⇒판관이 살아 있을 때의 이스라엘의 ⊂충실함⊂→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배반⊃→야훼의 ⊂처벌⊃ 등등의 주기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여러 판관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2장 6절부터 3장 6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을 위한 야훼의 업적들(요르단강을 건넘과 가나안 땅의 하사)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등장했을 때에 문제가 시작되었다(판관 2,10). 여호수아 아래서 지켜지던 충실성이 사라지고, 배반→적의 박해→울부짖음→구원이라는 주기가 시작하게 되었다.

 

이 서론부의 설명과 일치해서 대판관들에 대한 서술 각각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특정적인 형식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저희의 하느님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을 하였다. 그래서 야훼의 분노가 이스라엘에 퍼져서, 그분은 그들을 OOO의 손에 넘기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OOO를 수년 간 섬겼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 울부짖자 야훼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구제자를 세우셨다”(3,7-9.12.14-15; 4,1-3; 6,1.7; 13,1). 입다 이야기의 서두에서는 이 형식이 더욱 확대되어 있다.

 

 

각 판관들에 대한 설화(3,7-16,31)

 

삼손을 제외한 각 대판관들의 경력은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구출해 내었다는 사실에 의해 두드러진다. 즉 오드니엘은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으로부터, 에훗은 모압인들로부터, 드보라는 가나안족들로부터, 기드온은 마디안족들로부터, 입다는 암몬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었다. 비록 각 판관들의 생애는 매우 다르지만, 각자는 군사적 영도자였으며 그들의 군대가 승리를 가져왔다는 데에 있어서는 서로 공통된다. 여판관(女判官) 드보라의 경우는 예외인데 그녀의 군사적 영도권은 장군인 바락의 배후에 있었다. 일인 군대(一人軍隊)로 싸운 삼손은 그 경우가 독특하다.

 

① 오드니엘(3,7-11)

 

오드니엘에 관한 설화에는 구체적인 자세한 이야기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 시기에 대한 명확한 역사성(歷史性)을 제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판관들의 이야기에 관한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의를 주는 개념은, “야훼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3,10)는 말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하느님의 영”이라는 개념은 판관들의 설화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한 야훼의 분노 때문에, 이스라엘은 구산리사다임 아래서 고통을 겪었다. 이스라엘이 울부짖자 야훼께서는 카리스마적인 영도자 오드니엘을 일으키셨다. 야훼의 영이 그에게 내려 그는 구산리사다임을 쳐이기고, “사십 년 동안 세상은 평온하였다.”

 

② 에훗(3,12-30)

 

이 왼손잡이 베냐민 사람은 모압인들의 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모압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요르단강 너머로의 도피로를 차단함으로써, 십팔 년 간의 모압인들의 압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 내었다. 비록 그는 “판관”이라 불리지는 않았으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받은 사실은 길갈 가까이의 ‘조각된 돌들’을 그와 연관 짓는 사실에서 확인된다(3,19.26; 2,1 참조).

 

③ 삼갈(3,31; 5,6)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여섯 명의 소판관(小判官)들 중에서 삼갈만은 두 번이나 소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소를 모는 막대기로 육백 명의 불레셋인들을 사살하는 등 위대한 무훈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해 낸 유일한 소판관이다.

 

④ 드보라(4, 5장)

 

세번째 대판관인 드보라에 대한 서술은 독특하게도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산문(4장)과 운문(5장)이 그것이다. 이 둘은 모두 동일한 사건을 취급하고 있다. 후자는 드보라의 노래라고도 불리는데 다루고 있는 사건과 동시대의 것으로서 승리의 송시(頌詩)이다. 4장에 의하면 드보라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재판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판관”이다. 다른 대판관들과는 달리 그녀 자신이 ‘구제자’는 아니며, 4장과 5장에 의하면 그녀는 군사적 영도자 바락 배후에서 또 그와 함께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있다. 그 결과는 다른 대판관들의 경우와는 달리 침략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원주민인 가나안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항을 중지시키고 아주 중요한 에스들론 평야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드보라의 노래(5장)는 구약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승전(勝戰)의 노래이다. 또한 그것은 구약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 중의 하나이며, 뛰어난 아름다움과 신선미가 넘치는 노래로서 승리의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있을 때에 편집된 수집물에서 나온 것이다.

 

⑤ 기드온(6-8장)

 

기드온에 관한 설화들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가지는 특성을 아주 잘 말해 주고 있다. 미디안족의 압박(6,16)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그때 하느님의 사자(使者)가 한 농부의 아들에게로 와서 그를 부른다. 처음에는 그도 해방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11-24절). 그러나 원수의 진 앞에서 하느님의 영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는 전투 신호인 나팔을 불어 자기 지파 사람들과 이웃 지파 사람들을 불러모은다(33-35절). 그는 하느님께 원수를 자기 손에 맡기신다는 표징을 요구한다(36-40절). 그 다음 해방을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7장). 그는 야훼께서 말씀하신 삼백 명의 군대로 13만 5천 명의 미디안족을 쳐부순다. 싸움은 군사의 수나 칼이나 활로써가 아니라, 야훼께서 몸소 싸워 주시니 야훼를 신뢰하고 겸손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기드온은 특별한 야훼의 계시와 비범한 힘을 입은 참다운 카리스마적인 영도자이다. 그는 매년 침략해 오는 미디안족들에게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해 내는 데에 성공한다.

 

기드온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설화가 있다(8,4-21). 그는 왕이 되어 달라는 청에 대해 야훼만이 통치자가 되셔야 한다고 하며 그 청을 거절한다(8,22-23). 그러나 그는 전리품으로 취한 금으로 에봇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24-27절).

 

⑥ 부록 : 아비멜렉의 왕권(9장)

 

아비멜렉에 관한 이야기는 기드온(9장에서는 여룹바알로 통한다)에 관한 설화의 부록이다. 기드온과 그 첩에서 태어난 아비멜렉(8,3l)은 동료 세겜인들을 설득하여 칠십 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어 삼 년 간 다스린다.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을 살해한 죄에 대한 처벌로 그와 세겜의 운명이 끝난다. 아비멜렉의 통치는 결코 하느님에 의해 영감받지 않았고 또 그의 특성이 불미스러웠기에 그는 결코 판관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⑦ 소판관 돌과와 야이르(10,1-5)

 

삼갈 이외의 다섯 명의 소판관들 중 돌라와 야이르는 아비멜렉과 입다 사이에 사십오 년 간 이스라엘을 판관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판관의 경력에 대한 전형적인 짧은 형식은 오직 그의 이름, 족보 혹은 장소, 봉사 기간 그리고 그의 묻힌 장소에 대해 언급한다. 야이르의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삼십 명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이 차지한 “삼십 개의 천막촌”에 대한 부차적인 세부 사항은 야이르의 부(富)와 그의 가문의 넓은 영향력을 말해 주고 있다. [경향잡지, 1993년 10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⑧ 요약 몇 서론(10,6-16)

 

입다 이야기 앞에 놓여 있는 이 부분은 각 대판관들 이야기를 도입하는 특징적인 양식(지난 호의 ‘신학적 해설’ 참조)을 확대해서 지난 역사를 요약하고, 마지막 다섯 판관들에 대해 좀 긴 서론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2장 6절부터 3장 6절의 서론부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계속 빠져 들어가 경배한 일곱 이방 신(異邦神)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부르짖을 때까지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팔아 버린 일곱 이방 나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암몬족들과 불레셋족들에 의한 억압을 언급하고 있기에(7-9절), 이 부분은 뒤이어 나오는 입다와 삼손의 이야기를 도입하기 위한 목적인 듯하다.

 

⑨ 입다와 암몬족들(10,17-12,7)

 

암몬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한 길르앗 사람 입다의 이야기는 그 앞에 긴 서론부(앞의 10,6-16)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입다와 암몬족들 사이의 외교적 협상인 듯한 긴 중간 부분(11,12-28) - 그런데 이는 사실상 민수기 20장부터 22장까지에 바탕을 둔 모압족들에 대한 서술이다 - 도 갖고 있다. 다른 판관들과는 달리 입다는 비합법적인 탄생과 불법적인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숨어 살았었는데, 백성들의 요구 때문에 위기의 시대에 부름을 받았으며, 그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다면 “우두머리” 혹은 “통치자”로서 항구적인 지위를 약속받았다(10,17-11,11). 그가 장엄한 예식에서 성별(聖別)될 때(11,11), “야훼의 영이 입다에게 내렸다”(29절). 그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을 때에, 그는 야훼께 대한 맹세(승리 후 귀향 길에 그의 집 문에서 그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다는 맹세)를 성실히 이루기 위해 그의 외동딸을 희생했다. 그는 그의 딸을 희생하기 전에 그녀에게 자신의 동정(童貞)을 애도할 시간을 주었는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에는 한 가지 관습 - 입다의 딸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처녀들은 해마다 집을 떠나 나흘 동안을 애곡하는 관습 - 이 형성되었다(29-40절). 질투하는 에브라임인들을 아첨으로 기분 맞춘 기드온과는 달리, 입다는 그들이 요르단 강가에서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십볼렛”으로 잘못 발음해서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것이 탄로되면 그들을 학살했다(12,1-17).

 

⑩ 소판관들인 입산과 엘론과 압돈(12,8-15)

 

돌라와 야이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세 소판관들에 관해서는 단순한 양식으로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다. 즉 “그 사람 이후 (어디)의 (누구)가 이스라엘을 판판했다(“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몇) 년 간 판관했다. 그 후 (누구)는 죽어 (어디)에 묻혔다.” 야이르의 경우(10,3-5)와 같이, 입산과 압돈은 그들의 대가족 및 대단한 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분명히 특별한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⑪ 삼손과 불레셋인들(13-16장)

 

a. 삼손의 출생(13,1-24)

b. 야훼의 영을 받음(13,25)

c. 삼손의 결혼, 그의 힘과 수수께끼(14장)

d. 불레셋인들에 대한 복수(15,1-8)

e.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불레셋인 천 명을 죽임(15,9-17)

f. 목이 말라 야훼께 부르짖었을 때에 기적을 체험함(15,18-19)

g. 삼손이 가자의 성문을 어깨에 메고 가 산꼭대기에 던져 버림(16,1-3)

h. 들릴라가 삼손의 비밀을 캐어 냄(16,4-21)

i. 삼손은 죽으면서 불레셋인들에게 복수함(16,22-31)

 

마지막 대판관인 단 지파 출신인 삼손에 대한 서술은 성서 전체에서 아주 독특하다. 이는 일인 군대로서 근처의 불레셋인들을 항구히 격퇴한 초인간적으로 강한 영웅에 대한 민담(民譚)이다. 종교적인 동기가 부여되어서 이 민담은 종교적인 차원을 띠게 되었다. 삼손은 나지르의 서원(誓願)을 지킨 돌계집에게서 태어났다(13장) - 천사가 아기의 탄생을 미리 예고했다(5절). 딤나에 있는 불레셋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그곳으로 내려갔다가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이고, 이 체험에 대해 잔치 석상에서 수수께끼를 낸다(14,1-14). 불레셋인들은 사흘이 지나도 그것을 풀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서 답을 알아낸다(14,15-18). 이에 대해 삼손은 불레셋인들에게 복수한다(14,19--15,8). 그의 공적(功績)으로 인해 두 장소에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턱뼈 언덕”과 “하느님께 부르짖어서 솟은 샘”이 그것이다(15,9-20). 그는 불레셋 창녀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가자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가자의 성문을 두 문설주와 빗장째 뽑아 사십 마일 밖으로 내다 버렸다(16,1-3).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와 사랑에 빠져 그는 서원을 깨게 되었고 머리카락과 힘과 눈과 자유를 잃게 되었다(16,4-22). 마지막으로 그는 다곤의 성전을 무너뜨려 그 이전보다 훨씬 많은 불레셋인들을 한번에 죽였다(16,23-31). 이스라엘을 ‘불레셋인들’에게서 구하기 ‘시작한’ 삼손의 이야기와 더불어 판관들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게 되고, 뒤이어 오는 사무엘 상하권의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에 대한 길이 열리게 된다.

 

 

부록 : 두 부족의 동향(17-21장)

 

판관기의 결론부는 두 부족의 동향에 관한 설화로서, 단 지파의 이주와 그들의 새로운 성전 건립(17-18장), 그리고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사이의 전투(19-21장)에 대해 다루고 있다. 17-18장은 매우 초기 시대의 설화로서 우상 숭배에 대한 금지가 아직 시행되지 않던 환경에서 나온 설화이다. 에브라임 지파의 한 농부인 미가는 은화 천백 냥으로 신상(神像)을 부어 만들고 또한 그것을 모실 신당(神堂)을 지었다. 그리고서 떠돌아다니던 한 레위인을 사제로 모시고 일년에 은화 열 냥을 주기로 한다(17장). 그런데 불레셋인들에게 거주지를 빼앗긴 단 지파 사람들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는 중에 미가의 집을 발견하고서 미가의 신상을 빼앗고 사제를 데리고 “라이스”로 가버린다. 단 지파의 사람들은 미가에게서 빼앗아 온 신상을 세우고 섬겼으며, “그 신상은 하느님의 집이 실로에 있는 동안 줄곧 거기에 있었다”(18장).

 

19장의 이야기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에 관해서이다. 레위인 한 사람이 에브라임 산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베들레헴에서 데려온 첩이 하나 있었다. 그 첩이 화나는 일이 있어 친정으로 가버리자 그는 그녀를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녀를 달래어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미 해가 져서 기브아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 누구 하나 집에 들어와 묵으라고 맞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는데,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서 자기 집에 맞아들여 그들을 잘 대접한다. 그러는 중에 그 성에 있는 무뢰배들이 몰려와 그 레위인의 첩을 강제로 데리고 가 겁탈한다. 이러한 무뢰배들의 범죄는 나그네 접대 관습을 파괴한 심각한 범법 행위였으며, 더욱이 그것은 성적(性的) 문란이 동반된 범법 행위였다(19장). 이에 대해 그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국에 자가가 당한 일을 얘기하고 판단을 요구하였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끔찍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이날까지 일찍이 없었고 또 본 적도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 분노한다.

 

지파들이 동맹을 결성하여 그 범법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기로 한다(20,1-10). 그런데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 범인들을 내어 놓기를 거절했기 때문에(13절), 전체 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대결하여 싸우게 된다. 베냐민 지파가 이 싸움에서 패배하였으며 많은 베냐민인들이 죽었다(11-48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딸을 베냐민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들은 아내가 될 여자들을 실로에서 훔쳐다가 자손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21장).

 

이 부록 부분(17-21장)에서 한 가지 특징적인 사항은,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는 말이 곳곳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말은 네 번이나 나타나는데, 이야기 시작 후 곧 바로(17,6), 단 지파가 소개될 때에 간단하게(18,1), 베냐민 지파 이야기로 넘어갈 때에(19,1), 판관기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의 끝에(21,25) 각각 나타나 있다.

 

이 결론부(17-21장)는 다만 부족들의 권위와 관습만이 있을 때에 존재했던 비교적 ‘무정부 상태’의 비극적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부록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곧 이어 왕정(王政)의 대두로 개선된다. 이 부분의 이차적인 동기는 레위인들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레위인은 부족들의 배열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첫째 이야기에서 어떤 레위인이 단 지파의 최초의 부족 사제가 된다. 둘째 이야기에서 베냐민 사람들한테 손상된 그의 명예는 ‘전이스라엘’이 회복시킨다.

 

어떠한 요약도 없이, 부족들 사이에 생긴 일들에 대한 설화(이는 부록임)로써 판관기가 끝난다는 것은 좀 놀랄 일이다. 하지만 판관기는 수긍이 가는 짧은 말로써 끝난다. 즉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21,25)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적인 가치

 

판관기의 이야기는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인 의도는 벌써 지역적인 전승들로 유래되어 온 개개의 단편적인 설화들 안에 나타나 있다. 이 설화들이 부족 혹은 지파의 긍지를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야훼께서 예외적인 인물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확신에 근거해 있다. 이 책의 편집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관계에 대한 모범적인 예를 제시하기 위해 이 설화들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야훼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계속 관여하시고 또한 ‘전’(全) 이스라엘에 ‘항상’ 관여하신다는 확신을 제시하고 있다. 판관시대의 불행과 성공의 역사는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은총으로 귀환’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에게 관여하시고 또한 그들과 일치해 계심으로써, 그들에게 ‘응답’을 요구하신다. 그들이 그분께 드려야 할 응답은 ‘충실함’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분의 계명들을 준수하고(2,17; 3,4), 다른 신들 때문에 그분을 저버리지 않으며(2, 11.19.23; 3,7; 6,7.10; 10,6.10.13) - 그분을 저버리는 것은 매음 행위와 같다(2,17; 8,27.33) - 이방신들을 경배하는 자들과 관계하지 않는 것이다(2,2; 3,6). 판관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의무를 저버리고 불충실했기에 그들의 원수들에게 넘겨진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그분의 처벌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이스라엘에게 내려진다.

 

판관기는 우리에게 하나의 항구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이 없이는 그분과의 계약은 있을 수 없고, 죄는 하느님의 활동하심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판관기의 설화는 이스라엘의 ‘허약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인내심’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은혜를 다시금 내려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대하신다. 판관들의 승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은총을 내리고자 하시는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하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호세 11,8-9, 예레 31,20 참조).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하느님의 백성에게도 해당된다.

 

판관기는 ‘해방’(구원)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판관 시대에 행해졌던 원수들로부터의 잠정적인 구원은, 뒤이은 구원의 역사에 나타날 좀더 완전한 구원들에 대한 하나의 표본 내지 예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벌써 우리는 단편적으로나마,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 또 구원자들을 일으키시는 방법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야훼의 영이 임하심(6,4; 11,29; 14,6.19; 15,14)으로 특징지워지며, 그들의 모습은 아직 불완전하지만 다윗에게 적용되는 왕정 신학으로(1사무 16,13) 그리고 완전하게는 메시아에게 적용되는 신학으로(이사 11,2) 완성된다. 판관들은 앞으로 펼쳐질 구원의 역사 속에서 개척적인 제일보(第一步)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서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의 모범(집회 46,11-12)으로서, 그리고 약속의 실현으로 이끄는 신앙의 증거로서(히브 11,32) 우리에게 제시된다. [경향잡지, 1993년 11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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