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할례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가 2,21). 위의 복음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리실 적에 할례를 받으셨다. 이는 “대대로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계명에 따른 것이다(창세 17,12). 이렇게 유다의 모든 남자는 예외없이 정해진 때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아기에게 할례를 베푼다는 것은 본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앙 아시아 및 동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모르던 관습이다. 그래서 할례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들으면 낯선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례가 이스라엘에만 있지는 않았다. 에집트인, 근동 전역에 퍼져 살던 셈족 대부분,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 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여러 부족에서도 할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민족이 행하고 있는 할례는 일반적으로 남자에게만 하지만, 어떤 민족들은 여자에게도 그것과 비슷한 시술을 한다. 옛날 이스라엘 주변에 살던 모든 민족도 마찬가지인데, 불레셋인들만 예외였다. 이들이 그리스 쪽에서 이주해 온 인도 게르만어족 계통이었기 때문이다. 이 계통의 종족들에게도 할례라는 관습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널리 퍼진 할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탈출 4,25와 여호 5,2에 보면, 차돌칼로 할례를 베풀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쇠연장을 쓰기 전부터 할례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원전 11세기 전부터이다. 이스라엘에서도 창세 34,13-24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할례가 모세 이전부터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민족이 할례를 하게 된 까닭이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역시 먼 역사의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한 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의미이다. 곧 이 의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특정 종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할례는 일종의 성년식(成年式) 구실도 하게 된다. 이는 할례가 여러 민족에게서 사춘기나 결혼 적령기에 실시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처음에는 생후 여드레가 아니라, 성장한 다음에 할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할례의 둘째 의미는 위생적 또는 의학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겠다.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불필요한 포피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성생활을 용이하게 해주는 조치로서 혼인의 준비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본디 할례라는 의식이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전적으로 이 이유 때문에 수술을 한다. 그러나 위생이나 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이러한 면이 그렇게 강조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할례는 셋째로 신앙적 의미를 지녔을 수도 있다. 옛날 여러 신들을 모시던 민족들은 할례로써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에게, 자기들의 생산력의 상징으로 포피를 잘라 바쳤으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에게서 다산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집에서 가장이 할례를 거행하였다. 이는 할례가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의 성격을 별로 지니지 않았음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의미 가운데에서 어느 한 가지만이라든가, 또는 세 가지가 똑같이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민족이나 시대에 따라서 이런저런 의미가 주된 배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할례가 이스라엘에서 본디 어떤 의미로, 무슨 까닭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창세 17,23-27; 탈출 4,24-26; 여호 5,2-10 참조). 그러나 일찍부터 위에서 말한 첫째 의미가 굳게 자리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곧 이스라엘에서 할례는 특정 집단, 곧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 또는 ‘계약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입문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징표이다”(창세 17,11), 곧 아브라함의 남자 후손들은 할례로써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을 자기 몸에 직접 표시하는 것이다. 레위 12,3도, 하느님과 에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맥락에서 할례를 명하고 있다. 그래서 할례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님께 속한다는, 그분을 섬기는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표시가 된다(탈출 12,47-48). 그럼으로써 할례는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들, 특히 할례를 모르는 불레셋인들과 구분짓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판관 14,3; 1사무 14,6). 이러한 의미를 지닌 할례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의 함락, 유다 왕국의 멸망, 성전의 파괴와 함께 시작하는 유배 이전에도 물론 널리 실행되었다. 그러나 할례 그 자체가 중요성을 지니지는 않았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신명기는 할례를 두 번 언급하는데, 두 번 다 ‘마음의 할례’를 말한다(10,16; 30,6). 예레미야서도 한 번은 ‘마음의 할례’를 역설하고(4,4), 다른 한 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몸의 할례만 받은 자들을 모두 징벌”하시리라고 예고한다(9,25. 그리고 6,10에 나오는 ‘귀의 할례’도 참조). 그러다가 유배시대부터는 할례가 안식일 준수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두 행위가 선택된 민족에 속함을 드러내고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충실성을 고백하는 징표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할례가 중요성을 더해가면서, 유다인들이 겪는 위기의 한 초점이 되기도 한다. 기원전 200년대에 와서 유다인들이 할례를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어울리면서 자기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고 할례의 흔적을 없애는 일이 벌어진다(1마카 1,15). 또 유다 땅을 지배하는 그리스계 셀류코스 왕조가 박해를 일으킬 때에도, 할례가 큰 쟁점이 된다(1마카 1,48. 60-61). 할례는 사도시대에도 날카로운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사도들을 비롯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두 할례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이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열린 끝에, 할례가 그리스도교 입문의 의무가 아님이 선포된다(사도 15장).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갈라 5,6). 그러나 저 옛날에 선포된 신명기의 말씀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과 너희 후손의 마음의 껍질을 벗겨 할례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복된 삶을 누리게 해주실 것이다”(30,6). [경향잡지, 1998년 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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