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예수의 봉헌(루가 2,22-3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율법에 관한 깊은 이해를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그분의 천주성을 감안하면 하느님의 영이 그분의 첫 번째 교육자이겠지만, 인성을 두고 말할 때는 그분의 부모였음에 틀림없다. 루가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의 출생 때부터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경건한 이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에 아기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베풀었다. 할례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미의 태를 처음 열고 나온 맏배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성전 돈으로 다섯 세겔(이십 데나리온)을 성전이나 지방 회당의 사제에게 바쳐야 하는데, 지금 우리 돈으로 치자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백만 원 정도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낳아 기르는 경우, 본디 하느님 차지인 그 아이를 잠시 빌려 기르는 셈이다. 할례를 베풀 때는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예수님의 부모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그분의 맡은 바 소명과 이루신 위업에 잘 들어맞는다. 다음은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봉헌 이야기이다. 2. 22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3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더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산모의 정결례와 속죄에 관한 규정은 레위 12,1-8에 잘 나와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시적 생리 개념 탓에, 아이를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다고 믿었다. 곧 출산 때에 생명과 관련하여 신비적 힘으로 여겨진 피를 쏟게 되면, 이 피의 상실로 산모가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부정은 산모의 윤리적 과오와 관계없지만, 일정한 정화기간과 정화예식을 거쳐야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남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산모는 7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33일이 지나야 정화되는데, 이 40일 동안 집 밖에 나가서는 안된다. 여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두 주 동안 부정하고 정화기간도 두 배(66일)로 늘어나 80일 동안 외출 금지다. 이런 차별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가부장제도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정화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자신과 아이를 위하여 정결예물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예물로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에게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된다. 요셉과 마리아도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했으니, 그분들이 가난한 계층에 속하였음에 틀림없다. 정결예식과 속죄예식은 산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이 예식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엘카나가 부인 한나를 데리고 들어간 것과 같다. 이 밖에도 예수의 봉헌 이야기와 사무엘의 봉헌 이야기가 같은 점은 예언자 시므온과 사무엘, 여예언자 안나와 한나가 히브리말로 같은 뜻을 지녔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사무엘처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는 뜻이고, 안나는 한나의 그리스말 음역으로서 “은총”을 말한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곧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 기다려왔다고 되어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성령이 그 안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이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았다. 예루살렘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간절히 고대하던 시므온에게 그 이름이 시사하듯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주신 것이다. 시므온은 아기를 두 손에 받아안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그러면서 그가 아기를 두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은 그대로 예언이 된다. 나자렛 예수의 공적인 삶은 평탄치가 못하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감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겠지만,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려다 반대의 표적이 되신다(사도 28,26-28 참조). 그리고 그분의 예리한 통찰력 앞에서 반대자들의 속마음이 속속 드러난다(루가 5,22; 6,8; 24,38 참조).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처럼 분명하고 철저한 삶은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달려 찢기시는 것이 그분의 최후 운명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도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의 고통을 보며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듯 상처를 입을 것이다(요한 19,25 참조).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시므온의 말을 들으면서 요셉과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우선 시므온이 예수를 손에 안고 이 아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아기의 부모로서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스러운 그의 말을 ‘놀라워하였다’(공동번역의 “감격하였다”는 그리스말 원문과 약간 거리가 있어서, 원문에 가깝게 옮겼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도 마리아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루가 l,31-35). 또 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알렸을 때, 목동들이 보인 반응도 같았다(루가 2,11-14). 그 다음에 시므온이 아기가 장차 겪게 될 험난한 운명을 예언하였을 때, 그 부모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관해서는 루가 복음서에 아무 말이 없지만, 루가가 성모님에 대해 즐겨쓰는 표현으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을 법하다(루가 l,29; 2,19.51). 루가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봉헌 이야기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하고 소박한 믿음을 담담하게 전해준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내의 정결예식과 속죄예식에 함께 동행해 주었다. 가난하였지만, 나름대로 간소한 예물을 바치며 율법의 규정대로 모든 예식을 충실하게 치렀다(루가 2,39). 아들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아들이므로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렸다. 그리고 시므온에게서 한편으로 아들의 중요한 사명에 관하여 들으면서 놀라워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아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에는 아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시므온의 말을 듣고 나서, 아들의 삶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일생을 두고 되새겼을 것이다.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는 전통적으로 각 교구나 수도원에서 서품식이나 허원식이 거행된다. 위에 소개된 본문은 이날의 복음으로서 하느님께 속한 아들딸을 잠시 맡아 기르다가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부모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가르쳐준다. [경향잡지, 1998년 2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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