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저는 아이입니다”(예레 1,4-10) 예레미야는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예루살렘 북동쪽 5Km 정도 떨어진 아나돗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힐키야가 사제였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신심 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로서 그의 삶은 유년시절의 평온함과 달리, 유다 왕국이 말년에 겪어야 했던 격동의 세월처럼 박해와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고통의 예언자’로 기억한다. 그는 18세에 예언자 성소를 받았다. 때는 유다 임금 요시야의 통치 제13년, 곧 기원전 627년경이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였다. (구약성서 새번역)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저는 아이입니다’라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기 위함이다.” 4절의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는 말은 에제키엘서, 즈가리야서, 하깨서에서도 신탁을 끌어들이는 정식(定式)으로 자주 나온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에게 계시하신 내용이나 그분께서 예언자에게 전하라는 메시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선택하셨다. 삼손(판관 13,51), 세례자 요한(루가 1,15. 41), 바오로(갈라 1,15)와 예수님(루가 1,35; 요한 10,36)에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이런 ‘성별’이 있었다. 하느님께 성별된 예레미야에게 맡겨진 소명은 ‘민족들의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라니! 예레미야서의 내용으로 보아 ‘유다의 예언자나 조금 범위를 넓혀 ‘이스라엘 전체의 예언자’라야 맞지 않을까? 사실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신탁은 이따금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같은 이방 민족들도 대상으로 삼으며(예레 46-51장) 유다를 향한 신탁에도 뭇민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세우셨다는 5절의 말씀은 결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더구나 당시의 복잡한 고대 근동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예레미야의 안목을 감안할 때 ‘민족들의 예언자’라는 칭호는 그에게 잘 어울린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른다.’고 사양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직 공적으로 활동할 나이(30세 : 루가 3,23 참조)가 되지 않아서 말할 권리나 자격이 없어서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은 단호하다.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여기서 ‘누구에게나’는 히브리말로 ‘어느 곳에나’와 ‘어떤 환경에나’의 뜻도 들어있다. 하느님께 붙들린 자는 사람과 장소와 환경을 스스로 고를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어떤 사람에게 소명을 주실 때, 그와 함께 계시며 함께 사건을 일으키시는 ‘임나누엘’이시다(창세 26,24; 출애 3,12; 판관 6,12; 이사 7,14; 마태 28,19-20). 예언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민족들과 왕국들을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것이다. 앞의 네 낱말은 파괴를, 뒤 두 낱말은 건설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먼저 징벌을 알리고(2-25장; 46-51장) 그 다음 재건의 희망을 선포한다(30-33장). 예레미야의 예언직은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부르심을 받은 기원전 627년부터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까지이다. 요시야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안정과 번영을 누린다. 아시리아가 주변 국가들에 대한 억압의 멍에를 느슨하게 늦춘 틈을 타 요시야는 영토를 넓히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므기또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자 왕국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바로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을 고발하며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이제 재앙은 피할 수 없다. 백성 전체가 잘못된 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억압하는 자들도 억압받는 자들도, 착취하는 자들도 착취당하는 자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5,1-6 참조). 예레미야가 바룩을 시켜 건네준 신탁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 천천히 찢어 불에 태우는 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그의 설교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36장).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587년, 곧 느부갓네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 파괴까지로 예레미야가 가장 활발하게 예언직을 수행하던 때이다. 바빌론의 침략으로 그의 예언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다. 느부갓네살은 여러 차례 아람과 팔레스티나를 휩쓸고 그 도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유다의 독립이 장애로 드러났다. 이런 절박한 형편에 유다의 지도자들은 정세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바빌론의 급부상하는 세력에 맞서려고 이집트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왕실 중심의 친이집트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자율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 그의 아들 게달리야,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이 친바빌론파에 속하였다. 제3의 제안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극단 투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독립파’의 주장이다. 이들 사이에서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 장악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기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다를 징벌하시려고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바빌론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년, 곧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부터 그의 죽음까지이다. 바빌론에 유배 가지 않고 본국에 남은 백성은 세 가지 경향으로 갈라진다. 게달리야를 중심으로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한 친바빌론파,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자유독립파, 요하난이 이끄는 친이집트파가 그것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인 친이집트파는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이집트 망명길에 오른다. 예레미야의 흔적은 이 이집트 망명길에서 끊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시련을 겪던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소명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고통을 당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 시기에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고통을 당하신 하느님의 대변인 구실을 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대변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분의 고통을 증언해야 했기에 그들의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러운 역사 안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당해야 했던 인물은 예레미야였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친구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극도의 고독 속에 버려져 사면초가가 된 그는 자신을 낳은 날과 모태를 저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동족이 철저히 파멸되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예고하고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보아야 했다. 더구나 그가 전한 신닥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성실한 사랑을 쏟았건만 그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하느님, 사랑하는 그들을 징벌하신 다음 그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평과 원망과 항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은 자신의 고통과 동족의 고통과 하느님의 고통을 모두 안고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의인의 피맺힌 절규이다.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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