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에제 2,1-8) 에제키엘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와 구약성서 더불어 3대 예언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나 표현이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성서 학자들 사이에서 두 예언서만큼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 예언서에는 수많은 환시와 상징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나오지 않을뿐더러 예언서의 골자를 이루는 신탁들도 일관성 없이 배열되어 있어서, 이 책을 통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바빌론 유배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종말론적인 시야와 희망을 담아 전한 이 에제키엘서는 불신과 혼란에 시달리는 오늘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과 제시해 준다. (구약성서 새번역) 에제 2. 1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6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말아라.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다. 7 듣든 말든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아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에제키엘 예언자는 기원전 597년 1차 바빌론 유배 때, 스물다섯의 나이로 여호야긴 임금과 함께 바빌론에 끌려와서 유배 제5년(593년)에 소명을 받고(1,1), 2차 바빌론 유배 기간(587-539년)인 570년경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동안 예레미야와 같은 시기에 예언직을 수행하였지만, 그 둘이 예언을 한 장소와 배경은 서로 반대였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활동한 반면,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동하였다. 또 예레미야가 편지로 바빌론 유배자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반면,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예언서의 문체와 내용에 드러난 에제키엘의 성격과 예언 활동은 매우 특이하다. 그는 ‘모순의 예언자’이다. 사제로서 엄격한 규범과 규정을 중요시하면서도 때로는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어 행동한다. 수많은 환시를 보고 때로는 여러 날 동안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과 신탁, 그리고 그가 전한 환시들의 묘사는 정확하고 빈틈없다. 그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그들의 멸망을 가차없이 예고하다가, 이스라엘의 재기와 부흥을 선포한다. 이 같은 에제키엘의 상반된 모습과 활동은 그가 받은 소명과 직접 관련있다. 그는 이스라엘 운명과 역사의 대전환기, 곧 옛 질서와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소명을 받았으므로, 그의 예언과 신탁에는 절망과 희망, 파괴와 회복,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게 된다. 에제키엘이 소명을 받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는 갈대아인들의 땅 바빌론에 끌려와 유배살이를 하던 어느 날,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그발강 가에서 주님의 강력한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면서(1장)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은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2,1)는 하느님의 분부로 시작된다. 이 구절과 에제키엘 예언서 여기저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에서 천상의 신비스런 존재를 가리키는 칭호나,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께 부여했던 칭호와는 다르다. 주님의 놀라우신 발현 앞에서 제 발로 설 수조차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존재를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존재에 불과한 에제키엘에게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하시고는 그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신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덩이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신 것과 같다(창세 2,7).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일어선 예언자를 반역의 민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그들이 예언지를 통하여 선포되는 당신의 말씀에 반항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항(출애 4,1; 이사 6,9-10; 예레 11,21; 아모 2,12 등 참조)은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에서 널리 알려진 소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에제 2,6)고 이르신다. 그리고 그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신다(2,7). 말씀을 전하는 소명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거부 때문에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소명은 말씀을 전하는 이의 거부로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고 망설였다. 모세가 그랬고(출애 3,7-4,17) 예레미야가 그랬으며(예레 12,1-3; 15,10-21). ‘야훼의 종’도 그랬다(이사 42,18-20; 49,4). 그러나 일단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보람과 행복을 약속해 준다.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분부대로 그분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집어삼켰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2,8; 3,3). 에제키엘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주제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들이 저마다 일정한 영역을 지니고 그 영역 안에서만 거처를 정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스라엘인들이 포로로 끌려온 바빌론 땅의 신은 야훼 하느님이 아니라 벨과 마르둑이었다. 낯선 신, 벨과 마르둑의 영역 안에서도 이스라엘인들은 과연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느 때보다, 그리고 어느 예언자보다 수많은 현시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였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벨이나 마르둑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월자이시지만 당신 백성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내재자(內在者)이시다. 에제키엘서는 예언자의 직무를 세 가지로 소개한다. 환시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을 받고, 말씀과 신탁을 선포하며, 상징적 행위들로 하느님의 말씀을 현실화한다. 이 활동들을 오늘의 그리스도 영성에 비추어 풀이하면 명상과 말씀 선포와 실천이라 하겠다. 에제키엘이 이해한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복을 내리시지만(소명 이야기 : 1-3장), 거역하는 자들의 죄악은 반드시 징벌하신다(이스라엘의 징벌 : 4-24장; 다른 민족들의 징벌 : 25-32장). 그러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들을 새롭게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새 예루살렘과 새 이스라엘 33-48장). 위에서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로 규정하였다.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현재의 고통과 시련이 그 죄악의 결과였다고 정확하게 지적한 점에서는 그를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재건과 부활을 꿈꾸었다는 점에서는 이상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와 지역을 뛰어넘는 거룩한 하느님께서 거룩한 백성과 함께 거룩한 공간에서 함께 사실 수 있기를 고대하였다. 이런 그의 꿈과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언어가 필요불가결하였던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바빌론 군대에게 짓밟혀 황폐하게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표현한 에제키엘서 37장의 상징적 언어이다.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37,7-8 “구약성서 새번역”). 이렇게 다시 힘줄과 살이 붙고 살갗이 덮인 뼈들에 하느님이 보내신 숨이 닿자, 그 뼈들은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루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힘은 징벌을 위한 파괴에서도 드러나지만, 낮추어진 것을 들어올리고 약한 것을 일으켜 세우며 부서진 것을 회복시키는 데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경향잡지, 1999년 4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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