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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바오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1 조회수3,602 추천수1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리스도 교회의 세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바오로 사도이다. 그는 기원후 5-10년경 다르소에서 유다 베냐민 지파 출신 가정에 태어나, 랍비 가믈리엘 1세의 문하생이 되어 엄격한 바리사이파 수업을 받았다. 그는 조용한 성격의 명상가라기보다는 깨달은 바를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행동가였다. 유다교 신봉에도 철저하여 사교 집단으로 오해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지만 33년경 회심한 다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길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에 따르면, 네로 황제의 박해 때(64-68년)에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다교 골수분자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과 그리스도의 길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로 회심한 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였다. 이 만남과 회심을 우리는 바오로가 주님에게서 소명을 받은 계기로 본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관한 발언을 극도로 자제했던 바오로는 이 사건을 암시적으로 간단하게 언급할 뿐이다. “나를 어머니 태중에서 가려내어 당신 은총으로 부르신 분께서 당신 아드님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도록 계시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갈라 1,15-16. 200주년 신약성서). 우리는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극적으로 묘사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바오로의 소명 이야기로 내세워 해설하기로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사도 9. 1 사울로는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살해할 기세로 대제관에게 나아가서 2 다마스커스 회당들에 보내는 공한을 청하였다. 그 길에 들어선 자라면 남자 여자 할것없이 보이는 대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로가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 두루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지는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5 그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니 그분이 대답하셨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거라. 네가 할 일을 일러줄 것이다.” 7 동행하던 사람들은 어리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소리는 들렸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다. 8 사울로는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손을 잡아 이끌어 다마스커스로 데려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공동번역 성서와 200주년 신약성서는 이 대목의 제목을 ‘사울(로)의 개종’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개종이라면 바오로가 유다교를 떠나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것을 가리킬 터인데, 바오로는 이 사건 이후에도 유다교 신자로 남아있었다. 바오로뿐 아니라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유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다교의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바오로의 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박해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전하기로 마음을 바꾼 그의 회심 또는 개심을 전한다.

 

이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세 번씩(9,1-18; 22,3-16; 26,4-18)이나 나오는데, 세부묘사에서 조금씩 다르다. 9장의 기록은 바오로가 3인칭 단수로 등장하는 객관적 기록이다. 이에 반해 22장과 26장의 기록은 바오로가 1인칭으로 등장하는 자기 변론이다. 22장은 바오로가 자기를 고발한 유다 동족들에게 한 변론이고, 26장은 유다와 로마의 고위층 인사들 앞에서 한 변론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은 사건을 이렇게 반복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전도사(傳道史)에 길이 남을 이 중요한 사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회심 이야기로 돌아가서 먼저 사도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의 히브리식 이름은 베냐민 지파 출신 이스라엘의 초대임금과 같이 ‘사울’이고, 그리스식 이름은 사울의 그리스식 음역인 ‘사울로’이며, 로마식 이름은 바오로가 자기 친서에서 언제나 자기를 일컫던 ‘바오로’이다. 이 세 이름은 유다교의 철저한 종교 전통에서 자랐으면서도 그리스 문화에 정통하였고, 베냐민 출신의 순수한 유다 혈통을 지녔으면서도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얻어 제국의 혜택을 누렸던 사도의 생애를 잘 반영한다.

 

바오로의 삶 전체를 지배하였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빌라도에게서 받은 세 언어로 쓰인 죄목,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예수’(요한 19,19-20)도 히브리말, 그리스말, 라틴말로 쓰였다. 저마다 그분이 속했던 종교, 문화, 정치적 배경을 가리키는 이 죄목은 예수님의 보편적 왕권을 계시한다. 이 예수님을 세 가지 이름을 지닌 바오로가 지중해 연안 전역에 전한 것이다.

 

2절에 나오는 ‘길’은 신 · 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가리키는 표상이다. 사도행전에서 이 길은 구원의 길(16,17)이요 하느님의 길(18,26)이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나오는 길은 구원으로 이끄는 예수님과 교회의 길을 말한다(9,2; 19,9.23; 22,4; 24,22).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그리스도 교회에서 선교를 전통적으로 전도(傳道 : ‘길을 전함’)라고 불러 온 것은 매우 성서적이라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의 대사제에게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이 구원의 길에 들어선 다마스커스의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압송하려고 그 도시에 가던 길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만났다. 빛 속에서 어떤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빛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출애 3,4)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소리를 연상시킨다. 빛의 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된다(칠십인역 시편 4,6; 35,9; 55,13; 지혜 7,26; 이사 2,5; 60,19; 1요한 1,5-7; 1베드 2,9 등). 바오로는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이 현상이 신현(神現)임을 인정하지만 아직 주님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바오로가 ‘주님’이라고 호칭한 그분은 당신을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밝히신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초대교회의 부활신앙을 드러내는 동시에 스스로를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하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분이 새로운 형태로 당신의 추종자들 한가운데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주님은 바오로에게 직접 소명을 주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가 할 일을 일러주시겠다고 하신다. 17절에서 주님께서는 다마스커스의 유다 그리스도인 아나니아에게 바오로를 “내가 뽑은 도구로서 내 이름을 받들고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후손들 앞에 서게 될”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로써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요약한 청사진이 제시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13-21장), 아그리빠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것이며(26,2-23), 카이사르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25,12). 또한 바오로는 사도행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동료 유다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할 것이다(28,23-28).

 

소명을 받은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소아시아와 그리스 전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한다. 세 전도여행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에는 몇 가지 공동된 요소가 있다. 첫째, 세 여행의 출발지는 시리아 지방의 수도 안티오키아이다. 예루살렘이 유다인 선교의 중심지라면 안티오키아는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둘째, 바오로의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천사나 영의 인도를 받는다. 이는 예수님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는 데 아버지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따른 것과 똑같다. 셋째, 바오로는 새 선교지에 도착하면 먼저 안식일에 유다 회당을 찾아 유다인들과 성서를 바탕으로 토론을 벌인다. 그는 이방인 선교에 앞서 유다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한다. 넷째, 바오로의 선교활동은 유다인들에게서 배척을 받고 이방인들에게서는 환영을 받는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구원의 복음이 유다이즘의 틀에서 벗어나 온 세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통수단도 변변찮은 시대에 세 전도여행뿐 아니라 로마와 스페인 전도까지 감행한 바오로는 남달리 뛰어난 건강을 지닌 선교사도, 말주변이 뛰어난 설교가도 아니었다. 고린토 교회에서 그를 헐뜯는 자들은,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다.”고 인정하지만 “몸도 약하고 말주변도 부끄러울 정도”(2고린 10,10)라고 혹평하였다. 그의 편지가 무게가 있고 힘찬 것은 자신의 강렬한 신앙체험과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 신도들에 대한 사심없는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도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천막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비와 선교활동비를 마련하였다.

 

바오로가 보여준 그리스도와 복음을 향한 열정, 허약한 몸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간 불굴의 의지, 신도들에 대한 사심없는 애정과 헌신적인 봉사는 세기를 두고 모든 그리스도교 전도자에게 빼어난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6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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