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21) 영웅으로 떠오르다
정적(政敵)의 죽음에 옷을 찢고 울부짖다 - 다윗은 사울의 죽음 후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헤브론에서 큰 정치적 도약을 이뤄낸다. 그리고 민족을 이끌 영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사진은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다윗’상. 인기와 정치적 지지도는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 인기 연예인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기는 호감이지만, 지지는 신뢰다. 인기가 지지로 이어지기 위해선 호감이 신뢰로 바뀌어야 한다. 그 촉매제는 감동이다.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자만이 단순한 호감을 전적인 지지로 바꿀 수 있다. 대 골리앗 전투 이후 다윗의 대중적 인기는 급상승했지만, 이것이 곧 다윗의 정치적 지지도 상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윗 입장에선 사울의 방해 노력으로 정치적 신뢰를 쌓을 기회조차 없었다. 사울과 대적하기 위해선 탄탄한 지지기반이 필요했다. 유대 민족의 원수였던 필리스티아(블레셋)와 전략적 제휴에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필리스티아 망명을 통해 다윗은 비로소 사울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맘껏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드러낼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지도자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가나안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아말렉족을 쳐부순 후 그 전리품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다윗은 수준 높은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다윗은 유다 원로들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주님의 원수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일부를 어르신들께 선물로 드립니다”(1사무 30,26).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과거에 사울이 전쟁에 이긴 후 전리품을 독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1사무 15장 참조). 다윗은 사울과 의식적으로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점에서 다윗은 고대 사회에서는 드물게 ‘백성의 민심’에 눈뜬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렇게 다윗이 민심 확보에 주력하고 있던 어느 날 다윗은 사울이 필리스티아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 다윗의 행동이 의외다.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2사무 1,11-12). 다윗은 더 나아가 사울을 애도하는 노래(2사무 1,17-27)까지 짓는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은 사울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다윗의 태도 자체도 정치적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전 유대 민족을 이끌겠다는 야심이 이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울에 대한 다윗의 애가(哀歌)는 30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당연히, 사울을 추모하는 다윗의 일련의 행동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목숨을 위협하던 정적은 사라졌고, 더 이상 필리스티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유다 지파 성읍들 가운데 한 곳인 헤브론으로 간다(2사무 2,1). 헤브론은 가나안 남부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다. 한반도 남쪽의 대전쯤에 위치한 도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윗은 이 헤브론에서 큰 정치적 도약을 이뤄낸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 4). 다윗이 그동안 공들인 정치적 노력이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에는 필리스티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던 유다 지파의 성향도 한몫했다. 필리스티아에 망명한 경력이 있는 다윗이라면 적어도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유대 민족의 왕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아직 ‘단에서 브에르세바까지’(한국식 표현으로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모든 가나안 땅의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대 민족이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유다와 이스라엘, 유대의 구분을 어려워한다. 학자들마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긴 하지만 이 글 맨 처음에 밝힌 대로 이 글에선 유다는 가나안 남부 지역 즉 사해 서쪽을, 이스라엘은 사울왕이 기반으로 두고 있었던 예루살렘 이북, 즉 북부 가나안을 일컫는다. 이 글에서 쓰고 있는 ‘유대 민족’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칭하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남부 다윗이 승승장구 하던 그때 이스라엘(가나안 북부)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사울은 죽었지만 사울군은 아직 미력하나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과거 사울군의 사령관을 지내던 아브네르의 보호로 왕가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부 다윗왕이 탄탄한 지지기반 속에서 날로 성장세를 보인 반면, 북부에선 거듭된 정치적 혼란을 보인다. 왕을 배반한 북부 이스라엘군의 최고 사령관은(2사무 3,6-11), 다윗과의 밀약을 추진하다(2사무 3,12-21), 결국에는 다윗의 본거지에서 다윗 부하에게 살해당한다(2사무 3,22-39). 군 사령관을 잃은 북부 이스라엘에선 설상가상으로 왕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2사무 4,1-12). 가나안 남쪽은 현재 다윗이 다스리고 있다. 북쪽을 다스리던 왕조는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무너졌다. 누가 보아도 이어지는 결과는 뻔해진다. 백성들의 눈이 향한 곳이 어디겠는가. 다윗은 민족을 이끌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5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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