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27) 북 이스라엘의 방황
솔로몬 선종 후 쇠락의 길로 … - 북 이스라엘에선 유대인 특유의 하느님 유일신 신앙이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북 이스라엘의 타락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진은 카르멜산 입구에 세워진 예언자 엘리야 동상. “솔로몬이 죽었다고? 그리고 왕국이 둘로 갈라졌다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동안 솔로몬에게 눌려 살던 분풀이를 해야겠다.” 이집트의 왕 시삭이 분열된 왕국의 남쪽(남 유다)을 침공했다. 솔로몬이 죽고 난지 5년째가 되던 해였다. 이집트군 주력은 병거 1200대와 기병 6만이었다. 병거 1대에 딸린 병사를 4명으로 계산하고, 기록되지 않은 보병 및 보조군 수를 감안하면 동원된 병력은 총 1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이집트의 동맹인 아프리카 리비아와 수키군, 에티오피아군 등도 다수 참전했다(2역대 12,2-3 참조). 남 유다로선 이런 대군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남 유다 왕국은 별다른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왕국 내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를 이집트에 내주게 된다. 심지어는 철옹성 예루살렘까지 유린당했다. “르하브암 임금(솔로몬의 아들) 제 오년에 이집트 임금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주님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또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모두 가져갔다.”(1열왕 14,25-26) 다윗과 솔로몬이 애써 쌓아 놓았던 왕국의 부(富)가 대부분 이집트의 창고로 옮겨졌다. 국제 무역의 유통망도 대부분 이집트 왕 시삭의 손에 넘어갔다. 남 유다는 무장 해제됐다. 다행히 시삭은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고 철군했다.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켜 직접 지배하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조공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은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분쟁은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됐다. 이집트가 남쪽 유다를 침공한 틈을 타고 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코앞까지 진군해 요새를 건설했으며, 이에 남 유다 왕국은 이웃 나라인 아람에 원병을 청해 대치했다. 남과 북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북 이스라엘은 당초 남 유다의 과중한 세금 부과에 반대해 갈라진 나라다. 그런데 정작 갈라진 이후 세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 유다 왕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북 이스라엘 왕의 억압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렇게 억압 받을 줄 알았다면 남쪽의 유다와 갈라질 이유가 없었잖아. 게다가 남쪽에는 하느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있는데….” 이혼한 후 후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갔다. 북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신적 수도는 여전히 예루살렘이었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 건립 후 북쪽에 살던 제사장 대부분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겼다. 북 이스라엘 왕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책은 남 유다와 화해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북 이스라엘 초대 왕 예로보암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베텔과 단(오늘날 북한 지도에서 개성과 신의주 위치에 해당)에 산당을 만들고 여기에 주님의 상징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안치했다. 예로보암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남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북쪽에도 뭔가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북쪽 왕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눈과 귀, 발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금송아지는 바알 신앙의 한 단면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이건 아니다’다.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저버린 채, 자기들을 위하여 쇠를 녹여 부어 송아지 형상을 두 개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며, 하늘의 모든 군대를 예배하고 바알을 섬겼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2열왕 17,16-17) 남 유다는 달랐다. 3대 왕인 아사는 이교 신전을 폐쇄하고 전통적 하느님 신앙으로 돌아섰다. 아사 왕은 철저히 이교 신앙을 배척했으며, 심지어는 이교도였던 대왕대비마저 폐위시켰다. 이와 달리 북 이스라엘은 종교 혼합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북 이스라엘에선 유대인 특유의 하느님 유일신 신앙이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북 이스라엘의 타락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예언자 아모스의 입을 빌려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슬픈 노래를 들어보자. “이스라엘 집안아, 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애가를.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제 땅에 내던져졌어도 일으켜 줄 사람 하나 없구나 … 이스라엘 집안에서 천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열 명만 남으리라.”(아모 5,1-3)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온하지 않았다. 쿠데타와 내란, 왕권 도전이 그치지 않았다(2열왕 9,1-13 참조). 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왕이 등극했지만, 북 이스라엘에선 200년 동안 무려 20명이 왕위에 올랐다. 왕조도 9번이나 교체됐다. 재위기간이 1년도 채 안되는 왕이 7명에 달한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반면 350여년 동안 존속한 남 유다 왕국에서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7년이었다. 예언자들의 애끓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하느님 유일신 신앙으로부터 그렇게 점차 멀어져 갔다. 그 결과는….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30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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