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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39: 로마의 지배 - 영광도 잠시, 내분으로 무너진 새 왕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6 조회수5,037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39) 로마의 지배


영광도 잠시, 내분으로 무너진 새 왕조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시작된 유대인 독립 왕조는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기원전 63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의 새 주인이 됐다. 그림은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성전 침범을 묘사한 장 푸케의 작품.

 

 

이제부터 예수님의 할아버지 세대, 혹은 증조할아버지 세대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딱딱한 이야기는 가능한한 건너뛰고,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재미있게 글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이 부분에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 탄생 전후의 유대인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성장 환경과 그 배경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글에 대한 흥미의 반감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시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려는 이유다. 생소한 왕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복잡한 역사적 사건이 나열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은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카베오의 형, ‘시몬’에 의해 유대인들의 새로운 왕조인 하스모네아 왕조가 출범했다. 시작은 화려했다.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1세’(BC135~BC104 통치)는 과거 다윗과 솔로몬 왕의 영광을 재현하려한 야심만만한 왕이었다. 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주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정치적 야망도 컸다. 이 야망은 실현된다.

 

북쪽의 사마리아 땅과 남쪽의 이두메인들의 땅을 정복하여 완전히 굴복시켰으며, 더 나아가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기까지 했다. 할례와 제의 참여를 강제한 것이다. 일제가 이른바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위해 창씨개명을 실시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책은 히르카노스 1세를 이은 ‘유다 아리스토불로스 1세’(BC104-BC103 통치),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BC103-BC76 통치) 왕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결국 얀네오스 시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당시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근동에서의 유대인들의 역량은 막강해졌다. 바야흐로 유대인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하지만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는 늘 내부에서부터 싹트는 법이다. 가난할 때는 쌀 한 톨이라도 나눠먹다가도, 부유해지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부로부터의 반발이 일어났다. 바리사이인들이 보기에 타민족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유대 공동체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고, 율법 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치는 행위였다. 바리사이인들에게 있어서 하스모네아 왕조는 종교 공동체를 위한 왕조가 아니었다. 정치적 욕망을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한 채 정복 전쟁만을 일삼는 이들이었다. 특히 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닌, 뿌리 없는 왕들이 대제사장까지 겸임하는 것도 이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불만은 쌓이면 폭발하게 마련이다. 바리사이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얀네오스 왕은 용병을 동원,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800여 명이 도시 한가운데서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왕은 죽어가는 그들 앞에서 부인과 그 자녀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왕은 후궁들과 향연을 즐기면서 이 장면을 구경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울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계속되는 유대 사회의 분열과 반목, 혼란은 이때부터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한 울분은 이후 100여년 넘게 유대 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고 가는 씨앗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죽고 왕권이 왕비 ‘살로메 알렉산드라’(BC76-BC67 통치)에게 넘어갔다. 왕비는 경건했다. 왕비는 남편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등 자비의 정치를 폈다. 특히 그동안 왕권에 강하게 반발했던 바리사이인들을 중용, 불만을 잠재웠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유대인 사회는 잠잠해진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동시대의 한 역사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리사이인들은 통치자(살로메)가 여자인 점을 노려 온갖 아부를 하며, 마침내 통치 권력 전체를 장악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어느 누구라도 권좌에서 축출하거나 복직시켜 놓을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자를 풀어주거나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통치 권력의 이권은 바리사이인들에게 넘어갔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대전쟁사」).

 

유대 사회는 내부로부터 곪아 들어갔다. 이 상처는 결국 왕비 살로메가 죽은 이후에 터지기 시작한다. 복잡한 정치권력의 상관관계 속에서 살로메의 두 아들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왕위계승 투쟁을 벌인 것이다.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 입장에서는 무능력한 맏형 히르카노스 2세가 왕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에 군대를 모아 형과 대적, 예리코 전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장악했다.

 

가만히 앉아서 왕위를 물려줄 형이 아니었다. 장남 히르카노스 2세에게는 명분과 정통성이 있었다. 히르카노스 2세는 아라비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로 도주, 그곳에서 보병과 기병을 합해 5만명을 지원받아 동생을 재차 공격한다. 형제간에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내분은 로마의 개입을 불러오게 된다.

 

로마의 명장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의 요청을 받고 유대 지역으로 진출, 각 지역을 정복하고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지키는 성전을 침범했다. 학살이 자행됐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 1만2000명이 죽었다. 유대인도 일반인이라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폼페이우스는 군화를 신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 들어갔다. 외세(로마)를 끌어들인 장본인, 히르카노스 2세는 소망하던 왕위를 되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리아에 부임해 있던 로마 총독의 지휘를 받는 신세가 됐다.

 

하스모네아 왕조가 무너졌다.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시작된 유대인 독립 왕조는 이렇게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원전 63년의 일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700년 넘게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6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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