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4,1-11, 예수님의 유혹사건과 공생활 들어가는 말 마태오는 1-3장에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시절,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세례 이야기를 복음서의 서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4장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1-11절),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12-17절),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며(18-22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십니다(23-25절).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성령께 이끌리시어 광야로 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밤낮 단식하시며 육체와 정신적으로 피폐된 상태에서 당신 신원에 대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유혹과 시험의 의미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에서 ‘유혹’이나 ‘시험’의 의미는 구약성경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유혹과 범죄(창세 2,4ㄴ-3,24),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의 고통(창세 22,1-18)은 하느님의 시험과 순종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유혹과 시련의 대표적 설명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들은 사막의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 어려운 악조건을 극복하고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주실지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물과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고(탈출 17장), 모세를 향해 반역까지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거기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도 나의 속을 떠보고 나를 시험하였다.”(시편 95,9)라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대의 작품인 욥기에서도 하느님은 마귀에게 욥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니다(욥 1,12; 2,6). 이렇게 구약 여기저기에서 시험 또는 유혹이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든지 아니면 사람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두 가지 양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마태오는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유혹하는 자’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도록 사막으로 인도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킨다.’는 뜻을 갖는 ‘마귀’ 또는 마귀의 특성을 말해주는 ‘유혹하는 자’는 세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첫째는 “돌더러 빵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면서 당장의 허기를 기적으로 해결하도록 꼬드깁니다. 이러한 유혹의 말에 예수님은 신명기의 말씀 곧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8,3)고 대답하시며 그 유혹을 차단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밑으로 몸을 던지도록 유혹합니다. 어떤 지위에 있으면 우쭐대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를 부추기며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세워보라는 뜻으로 유혹자는 시편 91,12,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는 말을 대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6,16)고 단호하게 대답하시며 그 시험에 맞서십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그 좋은 모든 것을 다 줄 터이니 수락하는 의미로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신명기 6,13에 있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는 대답으로 시험을 이기십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유혹받으시는 이야기를 천사들이 시중을 드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체적으로 하느님의 계획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우연하게 광야로 가셔서 유혹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연약한 인간으로서 보통의 인간이 쉽게 빠지거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풀어 배고픔과 위험을 순간적으로 벗어나실 수 있고, 현재의 처량하고 빈약한 처지에서 안락과 세상의 호화로움으로 옮겨갈 수 있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메시아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인간으로는 참으로 끊기 어려운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시고 이를 극복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과 메시아의 위상을 세우신 것입니다. 새김 마태오는 예수님의 유혹사건에 이어 바로 갈릴래아 전도와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부르시고, 복음 선포와 병자치유의 시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 한 조간신문의 칼럼이 생각납니다. 청담 스님의 글이었는데 인간으로서 끊기 어려운 욕(慾)을 주제로 쓰신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서 인간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으로 스님은 ‘재물욕’, ‘성욕’, 그리고 ‘명예욕’을 꼽으셨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이 욕들을 다스리려 부단한 노력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끊기 어려웠던 ‘재물욕’과 ‘성욕’은 나이가 들면서 그런대로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늙어갈수록 더 스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 ‘명예욕’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의 글이 성경의 글자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유혹의 위력을 생각한다면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유혹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금력, 학력, 권력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악의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버티기가 참으로 힘들고, 유혹에 맞서 휘둘리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범은 우리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빵의 기적과 성전 꼭대기에서 보여준 만용의 유혹과 세상의 달콤함 앞에 주님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느님 말씀으로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결과를 파멸로 몰아가고, 유혹이 진행될 수록 헤어나오기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주님처럼 유혹의 초반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유혹에 빠질 가능성도 늘 안고 삽니다. 유혹자도 성경의 시편을 인용하듯이, 신앙의 삶 깊숙이에도 유혹의 뿌리는 터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혹의 손길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한지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문구도 넣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주님처럼 단호하게 거절하고 극복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는 유혹 앞에서 늘 서성거릴 뿐 아니라 거기에 휩싸여 중심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왔습니다. 유혹과 삶의 정화 누구나 유혹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진리의 길을 가는데 똑바로 따라가기를 우리는 모두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욥처럼, 우리는 끝까지 굳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통의 정체를 모르듯 유혹과 시험의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몇 년 전, 한 낯선 사람이 매일 같은 시간에 성당 뒷자리에서 성체조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열심한 분이시구나.’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근 일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주식에 손을 댔다가 몇 억의 손해를 보고 퇴직금까지 다 날리는 실수를 저질렀답니다. 내성적인 그는 자기만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부인에게 차마 알리지 못하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생명보험 몇 개 들어놓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은 한때 돈이라는 유혹을 버리지 못하여 실수를 저질렀지만, 부부가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성당에 열심히 나가며 주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는 세상 많은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신앙을 통하여 유혹과 시험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통과 시험을 겪고 나서 하느님께 아뢰던 욥의 고백을 새겨봅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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