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5,1-12, 참행복의 의미 산상설교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는 5장 1절에서 시작해서 7장 28절에서 끝나는데 그 장소가 ‘산’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대목을 두고 루카 복음과 장소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루카(6,17-23)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6,17)라고 기술하고 마태오는 “산으로 오르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에서 마태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반면 루카는 긍정과 부정이 상반되는, 행복선언(6,20-23)과 불행선언(6,24-26)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비교하면서도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려고 했는데, 산상설교를 마감하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7,28-29)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모세를 능가하심을 시사합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하느님 위치에서 직접 말씀하시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직접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참행복이란 마태오는 ‘참행복’(5,1-12)에 이어서 제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는 말로 5장을 끝맺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윤리적인 완벽이나 결함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자비가 있고 온유가 있고 정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 모습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율법들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참행복’은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영적 가르침임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비로소 우리의 참된 행복이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참행복의 조건들 ‘가난한 사람들’은 구약에서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는 고아와 과부 같은 처지를 의미합니다. ‘가난’이라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무엇인가 부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구약의 표현에도 없는 ‘영으로 가난한’이라는 고유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든든한 기반(명예, 재력, 직장, 가정, 후손 등)이 있어서 안전하고 보장받는 삶을 바랍니다. 그 조건들을 잘 갖추어야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으로 가난한 것은 그 차원을 포기하거나 넘어서는 경지를 말하는데 궁극적으로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부족하지 않은데도 스스로 가난한 상태로 내려가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5,4 참조)라는 말씀도 사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 큰 슬픔 때문에 울었던 기억을 하나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슬픔 때문에 울고 나면 가슴까지 후련해지지요. 본당사목을 하면서 매일 미사 전후에 가급적 고해소에 있으려 합니다. 한 분의 냉담한 신자가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거나 남편과 사별했을 때, 또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고 가족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게 될 처지가 되고 말았을 때,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은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오랜 기간 성당을 떠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그분들이 냉담의 기간을 마감하며 성당 문을 두드리는데, 이미 주님께 위로를 받고 새롭게 출발할 결심을 안고 돌아왔음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과 슬픔에서 방황하며 당신께 기대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겸손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지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5 참조)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나안 땅처럼 어떤 공간이 아니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남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도 행복해지며, 이미 하느님 영역에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보며, 가난한 이들을 부축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선한 모습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5,6)이라는 표현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의로움이란 구약에서는 어떤 기준에 맞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계명의 기준에 맞게 사는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의미하시는 의로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고 따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결론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의로운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세상의 가치관, 곧 출세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뜻을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말해야 한다.’ ‘올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가까운 식구부터 동료에 이르기까지 의롭게 살려고 하거나 표현을 하면 싫어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5,7)라는 말은 5절의 ‘온유한 사람들’과 일맥상통합니다. 자비는 ‘측은지심’ 또는 ‘동정’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상처를 받았으면 나도 상처를 받은 입장에서, 상대가 죄인이면 나도 죄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이해하며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남을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고 포용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관용과 온유는 사랑의 또 다른 한 면이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이웃과 그 마음으로 내 이웃의 뚜렷한 모습을 보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5,9)은 대립과 갈등을 조화롭게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 예를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움, 다툼, 분열이 있는 곳에 사랑, 용서, 일치를 이루도록 헌신하는 사람에게서 평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안녕?”이라는 인사말이 있듯이 ‘평화’란 ‘변함없는 고요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안일주의와 연결되기 쉽습니다. 전쟁과 갈등 뒤의 지친 상태에서는 쉼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수난과 고통을 겪고 도달한 부활이 주는 평화, 다시 말해서 저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참고 견디고 극복해서 얻은 결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5,10 참조)고 하셨습니다.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을 견딜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학순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주교님께서 감옥에서 고생하시던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미래에 대한 불투명과 소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표현을 즐겨 쓰지만 막상 그 당사자는 고통스럽고 약한 처지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를 부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이고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순간순간 깨닫게 됩니다. 지 주교님께서도 생전에 몇 차례 이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에 대해서 마무리하시면서 행복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당신 시련과 고통과 동참하면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새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산상수훈 가운데 ‘참행복’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위로받고, 흡족해 하며, 평화를 누리면서 이미 시작한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죄인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을 갖고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이미 초대된 예수님의 삶과 일치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이 인간의 눈높이에서는 고통과 소외의 대접으로 얼룩진 것 같았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의 빛과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그분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얻는 희망을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참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3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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