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이야기] (57) 동상이몽(同床異夢)
‘약속의 땅’ 복귀 꿈꾸지만 … - 1881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자행됐다. 박해는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벌어졌다. 그림은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자행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묘사(위)와 1903년 키시네프에서 일어난 박해로 희생된 유대인 아이들(아래). 여기서 잠깐,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00년도 초반까지의 당시 유럽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프랑스에선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의 불편한 입지가 확인됐다. 그렇다면 다른 유럽 사회의 유대인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 1881년 러시아의 황제가 죽었다. 유대인들이 황제 살해에 관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100여 개가 넘는 유대인 정착지가 폐허가 됐다. 실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유대인들에게 돌리는데 성공한 러시아 제정은 이후 유대인 학대에 대한 법적 근거를 착착 마련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직업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됐다. 유대인들은 견딜 수 없었다. 1881년부터 거의 매년 5만여 명이 러시아를 탈출했다. 1891년에는 11만 명, 1892년에는 13만 명이 러시아를 떠났다. 1905년과 1906년 대학살 기간에는 무려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했다. 복수심에 불탄 청년 유대인들은 제정 러시아 붕괴를 위한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들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러시아뿐이 아니었다. 1881~1894년에 총 80만~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를 떠났다.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영국도 유대인 범죄가 증가하자 수많은 유대인 죄수들을 호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의 장편소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가 유대인들을 악인으로 묘사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이는 것도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러시아 등지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선택한 새로운 땅은 프랑스와 독일 등 동유럽과 미국,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었다. 특히 프랑스에는 12만 명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프랑스는 자신들을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프랑스는 혁명(1789)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었던 나라였다. 하지만 프랑스도 냉랭했다.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단적인 증거였다. 당시 프랑스에선 유대인을 비판한 「프랑스 유대인」(에두아르 드뤼몽, 1886)이라는 책이 100만 판 이상 팔려나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이제 유대인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도 1861년에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 통일국가를 세웠다. 유대인들은 “우리도 한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난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착오”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 1896)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럽 사회와 통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오직 하나, 신앙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헤르츨의 주장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1897년, 그해 8월 29일 스위스의 바젤에서 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고, 수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헤르츨 주위에 젊고 다혈질적인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반유대주의자들도 찬성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러시아 내무장관 벤젤 폰 플레베(Wenzel von Plehve)는 “우리는 7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흡수할 수 있는 독립된 유대인 국가가 탄생하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오니즘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우선 시오니즘에 찬성하는 유대인 내부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렸다. 시오니스트 중에는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종교적 성향이 강한 자, 민족주의자 등이 혼재했다. 신념이 다르면 함께 할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시오니즘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유럽 각국의 부유한 유대인들이 이에 반대했다. 랍비 등 종교 지도자들도 시오니즘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시오니즘은 기득권층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오니스트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자 등 무신론자였던 점도 걸림돌이었다.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작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특히 독일 유대인들은 독일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독일에서 성공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오니즘은 해결책이 아니라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독일민족과 유대민족의 통합은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유대계 독일 중앙협회’(CV)가 1893년 베를린에서 창립됐다. 이들은 독일 유대인의 충성심은 독일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당시 독일은 유럽, 아니 전세계에서 고도의 문화를 자랑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단연 돋보였다. 범죄율이 유럽국가 중 가장 낮았다. 국민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나라는 당시로선 독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은 모두 독일에 있었다. 유능한 유대인들이 독일로 몰려들었다. 독일이 학문연구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33년까지 독일은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배출했다. 그 수상자의 30%가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특히 의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은 독일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50%에 달했다. 스포츠와 관련해서도 독일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전 20년 동안의 올림픽에서 13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고국에 안겨주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을 지지한다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조국(독일)이 단단히 혼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1914년 탄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독일군이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던 폴란드에 왔을 때,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환영하기 위해 몰려드는 유대인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눠 주었다. 그랬던 독일이…, 돌변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25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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