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충희 신부의 '바오로 서간' 해설] (56) 병마와 싸우면서도 선교활동에 매진 필레몬서 역시 바오로가 노예제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서간이다. 바오로는 필레몬서에서 1코린 7장 20-24절에서처럼 노예제도를 거론하지 않는다. 바오로가 오네시모스를 그의 주인 필레몬에게 보내면서 처벌하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면 바오로는 노예제도를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하겠다. 하지만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3장 20-28절과 1코린 12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한다. * 갈라 3, 26-28 :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 1코린 12, 13 :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라는 원론을 말하면서 동시에 각론에 들어가서는 노예제도를 그대로 인정한다. 바오로가 철저한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노예제도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노예제도 자체가 그리스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갈라티아 교회 · 편지 적수 바오로가 갈라티아로 불리는 소아시아의 한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에 위협을 가하는 적수들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려고 쓴 편지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다. 바오로가 이 서간을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것은 분명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지방에 보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갈라티아라는 명칭은 고대에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기원전 2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창설된 로마제국 속주의 주민들을 가리켰는데, 여기엔 남부지역에 위치한 피시디아와 프리기아 그리고 리카오니아도 포함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갈라티아인들이 살고 있었던 소아시아의 중부, 곧 지금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일대의 중앙평원을 일컬었다. 학계에서는 전자를 ‘갈라티아 남부설’로 후자를 ‘갈라티아 북부설’로 부른다. 갈라티아 남부설에 따르면 갈라티아 지방 교회들은 바오로 사도가 1차 선교여행(45~49년) 때 세웠던 안티오키아·이코니온·리스트라·데르베 교회들을 가리킬 것이고, 북부설을 따르면 안퀴라라 불렸던 지금의 앙카라 일대의 고원지대에 설립된 교회들을 가리킨다 하겠다. 바오로가 갈라티아 지방 어디서 선교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라티아 북부설’을 주장한다. 아마도 바오로가 편지를 쓰면서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1, 2)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미루어 바오로가 복음을 전한 도시 주변 마을들에 그리스도교 소공동체들이 생겨났던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2차 선교여행(50~52년경) 때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잠시 여행을 중단하고 갈라티아 지방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바오로는 요양 중에 그곳에 사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교회를 세웠다(4, 13-15 사도16, 6). 바오로에게 덮친 그 병마가 사도로 하여금 뜻하지 않게 갈라티아인들에게 머물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을 그냥 통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오로는 3차 선교여행(53~58년 경) 초기에 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교회를 다시 둘러본 후 에페소로 내려가서 무려 27개월 가까이 머물면서(사도 19, 8-10)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3월 29일,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