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40) Ⅵ. 예수님의 종말 담론 (마르 13장) ‘작은 묵시록’ 혹은 ‘공관복음 묵시록’이라고도 불리는 마르코 복음 13장은 마르코 복음사가 당대의 묵시사상,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 구약의 예언문학과 다니엘서, 당시 박해받던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상황 등을 모두 담아 엮어낸 것이라서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2세기 사이에 이스라엘에 크게 유행했던 난세(亂世)문학으로 외세의 침입으로 실의에 빠진 백성에게 종교적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인데, 역사의 종말과 천상영역의 신비를 꿈이나 환시, 상징과 비유 등의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기에 오해의 여지가 크다. 성전 파괴를 예고하심 (13, 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마치시고 떠나가실 때에 어느 제자 한 사람이 성전의 웅장함에 대해 감탄하면서 예수님의 동의를 구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데, 후에 유다인들은 이 예고를 마치 예수께서 친히 성전을 파괴하시겠다고 공언하신 것처럼 왜곡하여 선전한다. (14, 58; 15, 29) 3절의 ‘예수님께서 성전 맞은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라는 상황 묘사는 이미 마지막 때, 곧 ‘주님의 날’과 연결된다. (즈카 14, 4) 예수님께서는 미래와 천상세계에 대해 알려주시는 계시자로서 성전 파괴와 종말 도래가 다 이루어지기 전에 어떤 표징이 나타날 것인지 알려주시는데, 예수님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아들이 그 증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재난의 시작 (13, 5~13) 마르코는 예수님의 입을 빌어 거짓 그리스도를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그들은 전쟁과 지진, 기근 등의 상황을 보고 종말이 이미 도래했다고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키는데, 마르코는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뿐이라고 반론을 내세우며, 종말의 전조가 나타나기 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9절) 박해 받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대목이다. 가장 큰 재난 (13, 14~23)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반그리스도-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서 있으면 사태가 지극히 급박해졌다는 것을 알고 산속으로 빨리 도망치라고 예고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 이제까지 보지도 못한 큰 환난이 닥쳐오고 인간 사회에 대혼란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말고 항구한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선민들까지도 속여 넘어뜨리려고 표징과 기적들을 행하더라고 결코 넘어져서는 안 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종말 (13, 24~27) 이제 본격적인 종말사건에 있을 우주적인 대조짐에 대해 묘사한다.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에 이변이 생겨 하늘의 권세들이 제 기능을 잃을 때(이사 13, 10 참조)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다니 7, 13)을 보게 될 것이고, 선택된 이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소재를 사용한 것인데,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재림하시리라는 희망과 선민(그리스도인)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당부 (13, 28~37)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으로 구성된 권고로 다시 한 번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촉구하고 이 계획이 드러나고 절정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37절) 이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급박하고 유효한 당부이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느님 구원의 장(場)이지만, 그 오늘은 궁극적인 완성,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종말론적 현재이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2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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