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41-50) Ⅶ. 사람의 아들(人子)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마르 14~16장) 이제 바야흐로 예수님 생애 말기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친히 겪으시는 수난과 죽음(14~15장), 부활사건(16, 1~8)을 통해서 지금까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수시로 암시되어 오던 메시아의 비밀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1. 예수님을 죽일 음모와 죽음을 예비하는 예언적인 행위 (마르 14, 1~11) 수난사화 첫 머리를 장식하는 마르 14, 1~11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수난사건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 준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3~9절)가 예수님을 죽일 음모(1~2절)와 유다의 배반(10~11절) 사이에 샌드위치 구조로 편집되어 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들과 수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참 제자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을 죽일 음모 (마르 14, 1~2) 때는 예루살렘 체류 나흘째 되는 날, 파스카(해방절)와 무교절을 이틀 앞두고 있는 우리 식으로 수요일이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경축하는 해방절과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농경 축제인 무교절은 본디 다른 축제였는데 예수 시대에는 같이 지냈다. 해방절은 유다 월력으로 니산달(3~4월) 15일이고, 무교절은 그로부터 한 주간 계속된다. 앞서와 같이(11,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기회를 보고 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 (마르 14, 3~9) 예수님께서 베다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상을 받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는 도유(塗油)사화가 수난 사화 서두를 장식한다. 드물게도 네 복음서에 다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그 전승 과정이 꽤 복잡하다. 마르코와 마태오에는 거의 같은 형태로(마르 14, 3~9=마태 26, 6~13) 전해지고, 루가 복음서에는 전혀 다른 상황 안에서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죄인으로 소문난 한 여자가 회개와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렸다는 것이다. (7, 36~38)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서는(요한 12, 1~8) 전체 줄거리는 마르코를 따르면서 세부사항은 루가와 닮은 점이 많은데, 향유 부은 여자의 이름이 라자로와 마르타의 동기(同氣)인 베다니아의 마리아로 나타난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도유자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 루가복음의 죄녀까지 같은 인물로 취급하여 문학작품이나 그림에 ‘죄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로 묘사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각각 다른 여인으로 구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의 도유 사건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결과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죽음을 감지하고 옥합을 깨뜨려 그 안의 향유를 몽땅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예수님 목숨의 가치에 비하랴! 아까운 듯 돈으로 환산하고 있는 남자들의 처사가 냉정하기만 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름 없는 이 여자가 나에게 ‘좋은 일(선행)’을 하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고, 온 세상이 ‘기억하게 될 일’이라고 칭찬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의 행위는 해방절 기간 중에 특히 강조되는 덕행이고 거룩한 의무였다. 따라서 자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때’의 절박성이 부각된다. 여인의 말없는 행위가 수난의 길을 걸으실 메시아를 축복하고, 그 길을 따라야 하는 진정한 제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약속한 유다 (마르 14, 10~11) 이야기는 다시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향해진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가 음모를 꾸미는 이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한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도 ‘적당한 기회(때)’를 노리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2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2. 최후 만찬 (마르 14, 12~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때를 예감하시고 평소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극진히 준비하신다. 마르코는 특유의 샌드위치 작법을 이용하여 최후 만찬 준비 기사(12~16절) 앞뒤로 유다의 배반(10~11절, 17~21절)에 관한 기사를, 최후 만찬(22~26절) 기사를 유다의 배반(17~21절)과 베드로의 배신 예고(27~31절) 사이에 배치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시킨다. 최후 만찬 준비 (12~16절) 무교절 첫날, 곧 목요일인데 그날 오후(유다교 월력으로 니산 14일) 3시경부터 성전에서 파스카(해방절 혹은 과월절)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에(니산 15일) 예루살렘 시내에서 파스카 만찬을 먹게 된다. 파스카 식사는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모세를 통한 시나이 계약을 기억하고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축제의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고을 안으로 보내며,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나면 그를 따라가서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을 찾아 만찬 준비를 하라고 분부하신다. 이는 앞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새끼 나귀를 징발하신 것처럼(11, 1~11) 예수님의 전권을 드러내준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심 (17~21절) 목요일 저녁 파스카 식사 자리가 마련된다. 축제의 분위기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기쁨의 만찬이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는 음울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배반자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열둘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배신의 냉혹함을 극대화시킨다. 사람의 아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1절)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 속의 의인들의 고통, 곧 인간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여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반영한다. (시편 41, 10;55, 12~14) 배신자를 두고 하시는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1b절)라는 말씀에서 다시 한번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성찬례 제정 (22~26절) 최후 만찬은 정확하게 언제 어떤 모습으로 거행되었을까? 파스카를 기념하는 만찬이라고 보도하는 공관복음서(마태 26, 26~30; 루가 22, 14~20)와 바오로 서간(1코린 11, 23~26)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이별 만찬이라고 보도한다. (요한 13, 1;18, 28;19, 14. 31~34)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실제로는 파스카 하루 전날(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니산달 14일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드셨을 가능성이 높은데, 파스카 축제의 의미와 연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유충희 신부의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우리신학연구소, 1999)을 참조) 전승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최후 만찬기는 마르코 복음서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채록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두 가지 구전 모두 마르코와 바오로가 소속된 교회의 성찬례(미사)의 영향을 받아 윤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은 유다교의 친목 잔치와 비슷한데, 유다교의 회식 절차는 전식과 본식, 후식으로 이루어진다. 최후 만찬에서는 전식은 생략되고 본식에 해당되는 식사 장면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빵은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을 포괄하는 상징이 된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준 계약(출애 24, 8)과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 13~53, 12)를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써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대속죄(代贖罪)적인 죽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25b절)는 말씀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긴박감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잔치에 대한 희망이 예고된다. 마르코는 만찬 장면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의 죄를 없애고 생명을 주는 것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죽음의 잔은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승리의 잔으로 변화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1월 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배신하리라고 예고하심 (14, 27~31) 앞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14, 18~21)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른 제자들마저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즈카 13, 7)는 성경 기록대로이다. 그러나 즈카르야 예언자의 비관적 전망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라고 희망의 말씀을 주신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신 곳이다. 베드로는 모든 이가 예수님을 배신할지라도 자신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제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0절)라며, 당신이 처하실 철저한 고립의 상황을 예고하신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스승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완강하게 부인하지만, 그럴수록 말에 힘이 없어진다. 나약한 인간성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4.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심 (14, 32~42)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 산 기슭 겟세마니라는 곳에 이르신다. (26절) 다가올 죽음의 잔을 앞두고 극도로 번민하시며 하느님께 매달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도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고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34절)고 말씀하셨다고 보도한다. 증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하는”(38절)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세 차례 기도하시고 세 차례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는 마르코의 삼 단계 구성법은 깨어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잠은 수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제자들이 유혹의 상황에 가까이 놓여 있음을 상징한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36절) 예수님의 간구는 평소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잘 표현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 아빠(abba)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독보적인 호칭이었다. 아빠는 본디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말로, 지엄하신 하느님을 유다인들은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겟세마니에서의 갈등 상황은 수난과 죽음의 잔이 치워지기를, 수난 시간이 비켜가기를 간청하는 인간적인 욕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자신을 내어 놓는 순명의 태도를 보여 준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임박한 수난의 시간과 죽음의 잔 앞에서 일대 결단을 하기 위한 것으로 죽음의 필연성을 보며,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데 우선권을 둔다. 이는 신앙인들의 기도 자세로서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그의 행동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이제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겟세마니 간구는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어 왔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당부는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도 거듭 촉구되는 말씀이시다. 유혹의 상황은 매일 우리에게 실질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악의 힘이기도 하다. 예수 추종을 통한 하느님의 뜻의 실천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1월 1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5. 체포되심 (14, 43~52) 유다가 최고의회 의원들이 보낸 하인들을 이끌고 예수님께 옴 (43절)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 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42절)는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온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다. (43절) 그들은 유다의 최고법정을 구성하는 세 정당의 대표자들이 보낸 하수인이다. 음모는 항상 밤에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나 보다. 역설적으로 무기를 들고 있는 이들의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유다의 입맞춤 (44~46절)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44절) 배신의 신호는 입맞춤이다. 존경과 애정의 표시인 입맞춤이 불길한 죽음의 서곡이 되었다. 유다가 왜 제자직을 포기하고 적대자들과 한 패가 되었는지 복음서는 이유를 들려주지 않는다. 스승이 정치적 메시아로서 로마 제국을 향한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에 힘있게 앞장서기를 기대하다가 자신의 기대와 달라지니 스승을 배반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신약성경 외경인 ‘유다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배반한 것은 예수님을 돕기 위한 일이었다고 유다를 변호하지만, 유다의 행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처럼 얄팍한 우리네 실상을 보여주는 속임수가 아니겠는가? 대제관의 종을 쳐서 귓바퀴를 잘라 버림 (47절) 체포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하였는지 우연한 한 사건이 분위기를 알려준다. 누군가가(‘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고 한다. 마태오와 루카는 칼을 빼든 이가 ‘예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하고(마태 26, 51; 루카 22, 50) 요한은 시몬 베드로가 대제관의 종 말코스의 귀를 잘랐다고 하는데(요한 18, 10) 어찌 되었든 예수님이 체포되는 혼란스런 와중에 여러 가지 폭행사건이 일어 났음직 하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앞에서 인간은 그저 공격의 목표물일 뿐이다. 예수님의 긴 항변 (48~49절)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48~49절) 무장한 강도라도 잡을 듯이(예레 7, 11 참고)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러(예레 36, 26; 37, 13) 다가오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긴 항변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악인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예레미야와 이사야, 에제키엘 등의 예언자를 떠오르게 한다. 악인들은 자신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는 불경한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 14)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악이 판치도록 그대로 두실 것인가?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붙잡히게 된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제자들의 도주 (50~52절) 이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38절)는 당부의 말씀은 아랑곳없이 제자들 모두가 화급하게 도주를 하고 말았다. 마르코 복음에는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전한다. 이 청년이 누구였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복음사가 자신이거나 익명의 제자였을 법한데, 신앙심 부족한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마르코 복음사가는 절제된 감정으로 예수님의 체포 상황을 생생히 보도해 준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비열한 음모와 강제 구금, 소란한 와중에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피해 사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폭력 상황, 그 가운데 비겁하게 도주하는 제자들…. 예수님의 체포 사건은 박해 상황에 놓여 있던 마르코 공동체는 물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떤 기준으로 움직여지는지 다시 한번 신앙의 안목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6년 11월 1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6. 최고 의회의 신문과 베드로의 부인 (14, 53~72) 예수님께서 대제관 가야파에게 압송되어 신문(訊問)을 받으시는 장면(14, 53. 55~65)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否認)하는 장면(14, 54. 66~72)과 함께 보도된다. 마르코가 선호하는 샌드위치식 문학 기법으로, 두 이야기를 별개의 것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구도 안에서 서로 대조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대제관의 집 안뜰과 바깥뜰을 사이에 두고, 담대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예수님의 모습과,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위기 상황 안에서 자신을 감추는 베드로의 나약한 태도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대제관 가야파에게 압송되어 신문을 받으심 (53. 55~65절)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를 붙잡아(43~50절) 현직 대제관 가야파의 저택으로 압송해 온다. 헤로데 궁전 남쪽 시온산 부근에 위치한 대제관 저택에 최고 의회 의원들이 모두 모여와 재판을 연 것처럼 마르코는 보도한다.(53. 55절) 유다교 최고 의회(히브리어로는 산헤드린, 그리스어로 시네드리온)는 당연직 의장인 현직 대제관을 포함해서 정원이 71명이었는데, 예수 사건 하나를 심리하려고 과연 그 밤에 최고 의회 의원 전체가 소집되었을까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스럽지만, 대제관 측근 최고 의회 의원 몇몇이 예수를 심문했음 직하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작정하고 불리한 증언들을 찾아 나섰다.(55절) 신문의 첫 주제는 예수께서 성전 파괴와 재건에 대한 발설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전 파괴를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성전과 예루살렘 파괴를 예고하셨던 것 같은데(마르 13, 2) 예수 친히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며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14, 58절) 그러나 그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아 성전 모독죄는 성립될 수 없었다. (59절) 다음에는 “당신이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61절)라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이다. 대사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62절)라고 이제까지와는 달리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의 예수 앞에 바쳤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적인 칭호였다. 이에 대제관은 예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시켜 사형에 처할 빌미를 잡고, 함께 있던 자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시작한다.(65절) 베드로의 부인 (54. 66~72절)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50절) 베드로만이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르며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온다.(54절) 한밤중이라 날이 추웠던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다.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베드로를 찬찬히 살피면서,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하며 추궁한다.(67절) 베드로는 이를 부인하며 바깥뜰로 나가는데 이 때 첫 번째 닭이 운다. 그 하녀가 다시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라고 고발하고, 그들이 다시 베드로를 추궁하자 그는 두 번,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노라고 맹세까지 한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고,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한다.(72절) 증인으로서 아무 자격이 없었던 일개 하녀 앞에서 자신을 완강히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서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나약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인간성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코 복음이 저술되던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군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박해를 받던 시기였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독자들을 향해서, 박해의 시기에 베드로처럼 비겁하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당당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1월 26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7. 발라도 앞에서의 재판 (15, 1~20) 대사제 가야파의 집에서 밤새 신문(訊問)을 받으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 로마 총독 빌라도 앞으로 압송된다. 사형언도와 집행권이 없었던 유다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처형하려고 로마 법정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로마 관청은 아침 6시경 일출 때부터 사무를 보았다니 예수 압송 시간과 일치한다. 총독 앞에서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그 정체가 드러난다. 빌라도의 신문 (1~5절) 유다 지방을 다스리던 다섯 번째 로마 총독이었던 본시오 빌라도(재임 기간 서기 26~36년)는 평상시엔 지중해변 항구 도시 가이사리아에 상주하다가 축제기간이 되면 예루살렘에 와서 정무를 보았다. 1세기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의 글에는 빌라도가 잔인하고 독단적인 사람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복음사가들은 그에게 자못 동정적이다. 빌라도가 유다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압력에 떠밀려 마지못해 예수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2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유다인이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애매모호하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2b절) 듣기에 따라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자아의식을 지니셨지만(14, 62), 최고의회나 빌라도가 생각하는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겠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소하고, 빌라도는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로마인의 입장에서는 피지배국인 이스라엘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므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왕을 사칭했노라고 국사범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고발자들의 소란스런 거짓말 속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 받는‘야훼의 종’을 떠올리게 한다.(이사 53, 7) 사형 선고를 받으심 (6~15절) 죄인 하나를 석방하는 로마의 축제 관례에 따라 군중은 총독에게 예년처럼 죄수 하나를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하고 묻는다.(9~10절)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한다. 바라빠는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7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라빠 역시 여느 강도나 범법자가 아니라, 로마 점령군에 대한 반란군의 주도자였다고 짐작된다. 빌라도의 둘째 질문은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12절)로 변한다. 이에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거듭 소리 지른다.(13절) 빌라도는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14절) 하고 예수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시도하지만, 빌라도의 항변은 군중의 함성에 압도된다. 그는 예수를 풀어줄 경우, 황제를 배척했다고 자신을 고발할세라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십자가형에 처하기로 타협한다. 정의를 수호하기를 포기한 지도자는 더 이상 아무 힘이 없고, 사건의 소요 속에서 예수님 대신 바라빠가 사면된다.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메시아로서 홀로 십자가의 길에 들어선다. 십자가형은 맹수형, 화형과 더불어 노예나 식민지인에게 내려지던 가장 참혹한 형벌중의 하나였다. 유다인 왕에 대한 로마 군사들의 조롱과 학대 (16~20절) 예수님께서는 총독으로부터 십자가형 언도를 받은 다음, 로마 형법에 따라 총독 관저 앞 광장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편태와 조롱을 당하신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서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고 외치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는 흉내를 내는가 하면,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조롱한다.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통스런 채찍질이 가차 없이 내려지면서 형장으로 옮겨진다. 유다인들은 가장 많이 때릴 때 39대까지 때린 데 비해 로마인들은 마음내키는 대로 때렸다고 하니,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끔찍한 편태 장면이 결코 과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7. 십자가에 못 박히심(15, 21~32)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처형 당하시기 위해 총독 관저에서 골고타 형장으로 끌려가신다. 그 낱낱의 과정들이 지극히 절제된 감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모아, 마치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수난 장면 하나하나에 머물러 보자.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심 (21절) 예수님께서 가혹한 채찍질로 이미 기진하신지라 지나가던 사람을 붙들어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가 지고 간 십자가는 십자가의 수평대에 해당되는데, 십자가의 수직대는 처형 장소에 미리 박혀 있었다. 시몬은 자의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세상의 불의와 거짓을 드러내는 예수 죽음의 증인이 되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직분을 실현하고 있다. 해골 터 골고타 (22절)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곳은 예루살렘 제2 북부 성벽 밖 서쪽에 위치한 골고타로 현재 성묘성당이 세워져 있다.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타가 라틴어로는 갈바리아(Calvaria)이기에 처형 장소를 갈바리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사양하심 (23절) 누군가가 예수님의 고통을 삭감시키기 위해 마취제 구실을 하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건네는데 예수님께서 마시지 않으신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14, 25)던 서약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수난의 고통을 철저하게 감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심 (24a절) 십자가 사건을 전하고자 달려왔던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24a절)라고 지극히 간결하게 서술한다. 이로써 독자들은 오히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극적 장면을 만나게 된다. 로마군 형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짐 (24b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군 형리들이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였다”(24b절)고 한다. 시편 22, 19를 인용한 이 표현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고통 받는 의인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시각 (25절) 마르코는 예수의 수난기를 세 시간 간격으로 나누어, 빌라도 법정에 서셨을 때가 오전 6시, 십자가 처형이 오전 9시, 그리고 정오에 이르러 어둠이 세상을 덮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33~34절)고 전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돌아가셨다는 마르코의 의도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죄명 패 “유다인들의 임금”(26절) 예수님의 죄명은 명실 공히 로마제국의 국가질서를 위협한 국사범이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 말은 극도의 아이러니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 좌우편에 못 박힌 강도들 (27절)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처형되어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는데,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붙잡힌 열혈당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사범으로 처형된 예수님의 죄목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건만, 그들 또한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한다.(32b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함 (29~32절)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독한다. 시편 22, 8을 상기시키는 경멸하는 몸짓이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29b~30절)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심지어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님을 비아냥거리며 조롱한다. 마르코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만인에게 철저하게 버림받고 모욕당하시면서 고독하게 돌아가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1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9. 숨을 거두심 (15, 33~41)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절정의 시각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듯 정오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된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아모 8, 9)는 아모스 예언자의 ‘주님의 날’ 예고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아람어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곧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원하신다. 절망적인 심경의 토로 같은 이 말은 탄원기도인 시편 22편의 한 대목으로, 표면적으로는 하느님마저도 자신을 버렸다는 고독감과 절망감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러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려 절규하고 그분 안에 의탁하는 지극한 신뢰심을 보여주는 기도이다. 철저한 고독의 심연 속에서 대답 없는 부재의 하느님께 절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승리가 예고된다. 십자가 신앙은 어떠한 고통과 죽음의 절망도 하느님과 인간을 떼어놓지 못하리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절규를 듣고 있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고 비정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대면서, 행여 엘리야가 와서 기적적인 구출을 하는가 보자고 조롱한다. 그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예수님의 고독이 극대화된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37절) 이제 예수님의 죽음이 장엄하고도 간결하게 선언된다. 바로 이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고,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던 로마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고백한다. 복음서를 통틀어 지금까지 메시아 비밀로 감추어졌던 예수님의 정체가 만천하에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대제관 홀로 그것도 일 년에 딱 한번, 속죄의 날에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없어짐으로써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십자가 사건의 증인들로 여성들이 남아 있다. 남자 제자들은 모두 떠난 자리를 여제자들이 멀리서나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는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만이 참제자라고 보고 여인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각시킨다.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이다.(40절)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고, 그 밖에도 예루살렘에 올라 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41절) ‘따르다’와 ‘시중들다’는 제자직분의 내용을 고유하게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10. 묻히심 (15, 42~47) 수난사화에 이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례 장면이 뒤따른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앞으로 있을 빈 무덤 사화와 부활 선포를 대비하도록 준비시킨다. 최고의회 의원 중의 하나였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고 청한다.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당일에 묻으라는 율법 규정에 따라(신명 21, 22~23) 사형수의 시신을 당일에 묻는 것이 팔레스티나의 관례였던 것이다. 빌라도는 유다인의 관행을 존중하여 백인대장을 불러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요셉에게 시신을 내준다.(44~45절) 일몰과 더불어 시작될 안식일 겸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기 전,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싸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를 돌로 막아 놓는다.(46절) 장례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서둘러 짧은 시간에 약식으로 치러진 장례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안장되시는 것을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안장의 증인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부활의 증인이 됨으로써 참제자의 직분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17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11. 빈 무덤과 천사의 예수 부활 선언(16, 1~8) 마르코 복음 전체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향해 달려 왔다. 겟세마니에서의 체포에서부터 최고의회와 빌라도 앞에서의 신문,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돌아가심…. 숨죽이며 지켜왔던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안장으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일까? 죽음은 영원한 끝인가? 사흘간의 침묵은 세상을 멈추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일요일 새벽, 그러니까 유다인의 안식일이 지나면서 잠들었던 만상이 깨어나는 것 같은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여인들-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이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릴 향료를 사서 무덤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관습대로라면 안장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렸어야 마땅한데 서둘러 장례를 치르느라 때를 놓쳤던 것이다. 그들은 무덤 입구를 막아두었던 큰 돌을 어떻게 치울까 걱정하며 무덤에 이른다. 그런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3~4절)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무덤 안에 흰옷을 입은 젊은이, 곧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앞서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말한다.(5~7절) 갈릴래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던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나 공동체를 이루며 동고동락하던 곳이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6절) 빈 무덤은 부활의 한 표징이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죽은 사람이 부활할 때 시체가 소생한다고 믿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무덤에서 도망쳐 나와 두려움에 아무에게도 말을 못한다.(8절) 이러한 모습은 박해 상황 속에서 숨어 있던 마르코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제자직분을 온전히 수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코 원복음은 끝이 난다. 갑작스런 끝맺음에 대해 끝부분이 유실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오지만 알 길이 없고, 십자가를 강조해 온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적인 흐름에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12.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제자들의 파견(16, 9~20) 2세기에 이르러 마르코 복음서에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가 빠진 것을 보고, 익명의 다른 편집자들이 긴 결문(9~20절)과 짧은 결문(20절 이하)을 덧붙인다. 긴 결문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 또 다른 전승 등을 참조하여 예수님의 발현사화와 파견 소식 등을 전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요한 20, 11~18 참조), 길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루카 24, 13~35 엠마오 발현사화 참조),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루카 24, 36~49; 사도 1, 4~8 참조)등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예수님의 승천(루카 24, 50~53; 사도 1, 9~11 참조)과 제자들의 전도 사명(마태 28, 20 참조)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다른 복음서들과 균형을 맞춘다. 부활사건은 오직 믿음으로 체험될 수 있는 초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두려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져서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실제적 체험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5절) 이제 구원은 유다인을 넘어서 만민을 향해 열려 있다. 부활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 같은 능력이 주어진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능력,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17~18절) 부활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24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마르코 복음 말씀 나누기를 마치며 어느 덧 한 해가 훌쩍 지나 작별의 인사를 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애초의 마음은 차근차근 네 복음서에 대한 묵상을 차례로 해 가는 것이었는데, 저의 호흡으로는 좀 숨이 차서 아무래도 쉬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동행해 주셨던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성경 읽기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영적 지혜가 쑥쑥 자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마르코 복음은 언제나 저희의 부족한 믿음을 일깨우며 삶의 불필요한 가지들을 쳐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십자가를 향한 우리의 목표를 잃지 않고 단숨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어떤 긴장감과 비장한 각오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로 번번이 넘어지며 딴전을 피우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결코 어리석은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어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여인, 부활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여인들처럼 인내와 용기로써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사 하고 청해봅니다. 복음서를 해설하는 글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문체가 간결해지고 아무런 미사여구(美辭麗句) 없이 내용의 골자만 담대하게 전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믿음이 씩씩하고 굳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용기가 부족하여 혹시라도 제 삶의 길에서 십자가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드럽게 개인적인 묵상이나 느낌을 충분히 담아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멀찍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막연한 두려움에 질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나의 현실로 꽉 끌어안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용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관념 안에서 십자가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정면으로 싸워 이기려는 굳은 의지 말입니다. 얼마 전 한 후배에게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놀라운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교생인 맏아들이 학교 선배에게 산으로 끌려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고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성한 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 몸에 피멍이 들고, 피아노를 전공하려는 자식의 으깨진 손가락 마디마디를 보며 순간 만감이 교차되었다고 합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 폭력을 휘두른 아이에 대한 분노 등. 그러나 만사를 뒤로 하고 그저 자식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마치 갓난아기 다루듯이 정성껏 치료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자기 아이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면서, 치욕과 분노로 절망하며 방황하던 아들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기적처럼 일어서더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이렇게 상처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생명이 아닐까요?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완전히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한 짝인가 봅니다. 부활의 체험은 한 여인의 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강생의 신비로 이어집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기처럼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하느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마태 1, 23). 엄마 뱃속의 아기는 엄마와 구별되는 독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와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이렇게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6, 5) 세상 한 가운데 임하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사랑으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 탄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톨릭신문, 2007년 1월 1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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