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욥기 (5) : 욥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경건’과 ‘불경’ 함께 지닌 욥 가끔씩 자신이 지독히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녹음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음성을 들을 때, 비디오에 담긴 자기 모습을 볼 때가 특히 그런 때이다. 언젠가 필자의 강의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웬만해선 자신의 강의 테이프는 듣질 못한다. 너무도 낯설고 실망스러운 목소리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 때 필자는 스스로가 입력해온 자신의 이미지가 얼마나 현실과는 유리된 환상이며, 현실은 얼마나 초라하고 실망스러운 것인지를 아픈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겸손해야겠구나, 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욥기는 성서의 그 어느 책보다 유명세를 겪은 책인 만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되어온 이미지와 선입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욥기의 본래적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가공된 이미지들과 선입견을 벗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욥기에 대한 몇가지 오해들을 바로 잡아 보고자 한다. 1) 친구들의 논의 부분에 너무 편중하는 태도. 웬만한 가정, 음식점에 가면 의례 걸려있을 법한 성구액자에 욥기라는 부분이 써져있다면 십중팔구는 세 친구들의 언사에서 인용된 부분들이다. 욥기의 세 친구들이 피력한 언급들이 욥기의 그 어떤 구절보다 부상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고통과 삶의 무게에 괴로워하는 욥에게 그들이 보여준 강한 신앙과 유다 전통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리고 지난주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욥기의 상당 부분이 「욥과 친구들과의 담화」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들의 논지가 부각되어진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욥기의 조연에 불과하고, 더욱이 그들이 강조했던 유다 정통주의 사고는,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는 결론을 보여주기 위해 적용된 일종의 문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다 전통주의, 고전적 사고방식만으로는 세상과 인간, 그 주변의 문제들을 다 풀 수 없다는 것을 욥기 저자는 친구들의 연사를 통해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현실 분석은 기존의 전통사고방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신학적 대안의 기능을 수행하였다(유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 지면에서 소개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비판적 관점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욥기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또 다른 왜곡은 「산문부분」(서론(1~2장)과 결론(42, 7~17)에 등장하는 욥의 이미지, 즉 그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지혜롭고 경건하게 신앙을 지키는 모습만을 절대화시키는 태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운문 부분」에서 제시된 불경스럽게 저항하는 욥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오로지 순종하는 욥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절대적 신앙에서 기인하였다. 그러나 욥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운문부분에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전가한 하느님께 강력하게 저항하는 욥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즉 욥기는 신앙의 모델로 제시된 욥과 신앙 때문에 괴로워하고 저항하는 욥의 모습을 병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은 욥이라는 한 인간의 내부 안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할, 인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써, 한 쪽 만을 강조하여 부각시키거나 다른 쪽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욥의 불경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킨 채 경건한 모습만을 강조하는 해석 역시 욥기를 왜곡하는 태도라 할 수 있겠다. 현명한 사랑 스스로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깨달음은 지금껏 애써 구축해온 자신의 이미지를 한 순간 무너지게 하지만, 그러나 그건 다분히 생산적인 작업이다. 대가로 겸손과 정직한 정체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경건한 신앙을 지켰던 욥, 친구들이 제시한 교과서적 모범 답안 등이 욥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지만, 욥기의 진정한 의미는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 하느님(38, 1~42, 6) 안에 제시되어 있다. 고통은 절체 절명의 절박함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임을 최후에 등장한 하느님은 명확히 제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힘겹고 낯설다고 느껴질 때, 그 가면을 벗고 좀 쉬어볼 일이다. 실망스럽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호의적일 수만은 없겠지만, 그런 본래의 자신에게 적응하면서부터, 스스로에 대한 현명한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0월 2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