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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변모의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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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7 조회수1,485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변모의 산에서(Auf dem Berg der Verklärung)

 

 

인간은 결코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가지려 합니다. 원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으면, 그 즉시 다시 새것을 추구합니다. 이 순간 여기 있으면서도 늘 다른 곳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곳에 다다르면, 이미 그 다음날 다른 곳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과도 어긋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성공들에 심취해 있거나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면서도, 실제로 자신에게 속한 유일한 시간인 현재에 대해서는 잊고 삽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불만 없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해하며, 과거나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평안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른 이들처럼 찹찹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바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평온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살면서 정말로 행복한 순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여정 끝에 갑자기 저 멀리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오거나, 또는 어떤 이와 매우 가깝게 되어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마냥 행복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친밀함’과 ‘행복’도 삶의 필요성들에 의해 늘 다시 사라지고 맙니다. 급한 일들, 지루한 기다림,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 수고와 질병, 슬픔과 불행,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들이 늘 닥쳐옵니다.

 

하지만 갈망은 여전합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완전한 친밀함의 순간은 없는 것일까?” “어린 나뭇잎처럼 찬바람에 떠는 행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원을 간직한, 흔들리지 않는 평온이란 있을 수 없을까?” 하는 갈망들 말입니다. 분명 인간은 끝도 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길이 모이는 곳,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평온의 끝자리, 현재의 삶에서도 이미 행복으로 꽉 채워진 순간, 더 이상 상실이 없는 지점을 추구합니다.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에서

 

높은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해마다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대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절의 전례에 근원적 기초가 되는 이야기로서, 전례주년의 가, 나, 다해 사순 제2주일에 매번 봉독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곧 냉철한 일꾼이며 어부요 잡은 물고기를 팔아야 하는 상인이었던 시몬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참조: 마르 9,5; 루카 9,33).

 

무슨 말일까요? 이 견실한 일꾼이며 어부요 상인인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의 말은,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보고 싶지도 않고, 지금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이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뜻이지요. 베드로는 정신이 나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자, 그 순간에 모든 인간이 꿈꾸는 것,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하여 이 순간이 그대로 지속되어야 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아야 하며, 그렇게 영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말씀이 그 당시 목격 증인들처럼 우리에게서도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해마다 사순 제2주일의 전례에서 듣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이미 여기 이 역사 한가운데에 그런 장소가 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도 시몬 베드로와 같은 체험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 역시 그 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초막 셋을 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는 순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고, 최종적으로 영원히 고향집에 도달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오늘 늘 다시 새로운, 완성의 선지급 같은 축제의 시간이 있습니다. 새것, 전혀 다른 것에 이미 문이 열려 있는 곳, 하늘이 이미 땅을 만지는 곳, 영원이 시간을 만지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소에 어떻게 다다르고 그런 시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조건


먼저,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생생한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역사를 상징하는 게 제자들의 눈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세와 엘리야입니다(마태 17,3; 마르 9,4 참조). 이 둘은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인 국면을 상징합니다. 곧 모세는 이집트에서의 탈출과 새 사회를 위한 시나이산에서의 계약의 체결을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백성으로 하여금 늘 거듭 자신의 유일한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촉구한 수많은 예언자들을 대표합니다.

 

이 둘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이 말은, 세상의 구원은 역사에 대한 망각과 상실이 아니라 역사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기억을 통해 온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역사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이와 분리해 바라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분은 오랜 신앙 역사의 열매이십니다. 모세와 엘리야 없이는, 그리고 그들로 대표되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 없이는 그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역사와의 대화’라는 거창한 말은 ‘예수님 이후의’ 시대에도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역사와의 대화’는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고립화에 맞서고 서로 대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무엇보다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벌어지는 현재의 역사를 우리에게 해석해주는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역사와 그것이 옳았든 잘못되었든 그 궤적들을 되돌아보고, 위대한 신학자들과 위대한 성인들,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 안에 거듭 불을 붙여주시는 쇄신의 운동들을 돌아보며 그 모든 것에서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둘째 조건

 

우리가 갈망하는 곳을 발견하기 위한 둘째 조건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마르 9,7; 루카 9,35)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역사는 예수님에게서 절대적인 정점에 도달하고 최종적인 명료성을 획득합니다.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을 믿는 제자 공동체 안에, 그분의 제자들을 지지하는 모든 이 안에, 한마디로 교회 안에 결정적으로 구체적인 형태가 있고, 이 형태 안에서 세상이 구원되고 영광스럽게 변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을까요? 그분의 말씀을 들을까요? 교회를 위해 살까요? 아니면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에게만 귀 기울이고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셋째 조건

 

셋째 조건도 복음서에 아주 명확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루카는 어쨌든 그들의 대화를 그렇게 해석합니다(루카 9,30-31 참조).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올바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는 마태오와 마르코에게서도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수난 신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쓰라리게도 모세는 광야의 여정에서 투덜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저항에 늘 거듭 부딪힙니다(예를 들어 민수 14,1-4 참조). 후에 엘리야 예언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도 없습니다(1열왕 19,10 참조).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 속으로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수난의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 때문에 거부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망과 예수님의 것을 세상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 때문에 자신의 원의와 계획들을 끊임없이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을지, 우리는 모두 그 앞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본적으로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때문에 루카는 마르코 복음서의 텍스트에 편집상으로 이런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루카 9,34) 구름이라는 이 원초적인 상징에는, 구름의 보호 아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의 광야의 역사와 모든 것을 사르는 하느님 현존의 불이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불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구름이라는 성경적 상징에는 또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영광의 빛(2코린 4,3-6 참조)과 수난의 어둠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따르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그 어둠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구름의 빛과 어둠 속에 사는 사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마태 17,5; 마르 9,7 참조)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이미 지금 이 시대 한가운데서, 사순 제2주일의 복음이 말하는 그 장소와 그 시간을 체험합니다.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과 온전한 현존의 시간을 체험합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모든 과거가 하나로 모이고 모든 미래가 이미 시작된 시간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더 바랄 게 없는 시간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보기를 바랐던(루카 10,23-24 참조) 바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철학자들은 그저 생각만 했고 시인들은 그저 꿈꾸기만 했던 것,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작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미 지금 이루어지는 것(루카 6,20-23 참조), 바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변모의 산 - 우리에게도!

 

이 모든 게 그저 아름다운 꿈일까요? 그런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는 불가능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마지막 이별의 저녁에 남겨주신 성체성사의 보물 속에 바로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성사야말로 지금까지 여기서 말한 정확히 바로 그 ‘장소’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세 제자와 아울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우주의 중심인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온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부활하신’(콜로 1,12-20 참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주의 중심이십니다.

 

또한 이 성사야말로 모든 시간의 중심입니다. 성체성사에서 하느님 백성의 모든 역사가 모이고 미래가 앞당겨 이루어집니다. 이 성사는 우리가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마르 2,19; 루카 12,35-38; 22,27 참조) 참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원 속에서도 이보다 더 가까운 하느님 곁의 친밀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친밀함만이 믿음 안에서의 친밀함으로 남습니다.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바의 실체가 그때에 밝히 드러나고,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복된 친밀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생활성서, 2020년 3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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