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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여인: 수산나 - 거절과 저항의 용기 보여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4 조회수5,454 추천수2
[성경 속의 여인] 수산나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거절과 저항의 용기 보여줘


요즘 우리는 주변이나 언론매체를 통해서 직장에서의 성추행과 성폭행에 관한 소식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이러한 불쾌한 일을 우리가 직접 겪는 경우도 간혹 있다. 참으로 폭력적이고 무서운 세상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 간혹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그 책임의 일부를 묻기도 한다. 그의 현란한 옷차림이나 몸가짐이 그러한 범죄를 간접적으로 야기하고 혹은 선동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다. 그리고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성이 성을 도구로 삼고 악용했다는 것이다.


수산나 이야기의 개요

구약성경 다니엘서가 전해주는 수산나 이야기(13장)는 바빌론 유배시절,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아직도 많은 관심을 끄는 이야기다.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하여 여성이 남성문화의 희생양이 되었던 시대가 한참 지난 현대에도 수산나의 이야기는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나약한 여성이 자주 겪는 함정과 곤경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거센 폭력과 악의에 찬 음모에 저항하는 관점에서도 이목을 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를 남김없이 내주어야 하는 무기력한 체험은 오늘날도 많은 여성과 소녀들과 어린아이들, 심지어는 남성들마저 겪는다. 따라서 수산나의 이야기를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들은 당시 바빌론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살았다. 그들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행정권을 자치적으로 행사하였고, 사법권도 독립적으로 행사하였다. 수산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원로는 상당히 부패했었고, 따라서 음모를 꾸밀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다인 백성 가운데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아주 부유했던 요아킴은 그들에게 자기 집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내주었다.

그런데 요아킴에게는 매우 아름답고 주님을 경외하는 아내 수산나가 있었다. 수산나는 자주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는데, 이것을 본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실현할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 무방비상태로 목욕을 하는 수산나에게 달려가 협박하였다. 곧 자신들의 뜻대로 잠자리를 함께 하든지 간음죄로 고발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다.

수산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진 것을 느꼈다. 그들의 강요에 따르자니 하느님의 계명을 어겨 큰 죄를 짓는 것이고, 그들의 강요를 거부하면 간음죄로 고발되어 틀림없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할 것임을 수산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산나는 당당한 태도를 취하며 그들의 강요에 저항하였다. 자신들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두 원로는 처음에 협박했던 것처럼 이제 수산나를 간음죄로 고발하였다. 수산나가 정원에서 하녀들을 내보내고 어떤 젊은이와 정을 통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 그리고는 수산나를 법정에 세웠다. 그들은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백성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수산나는 아무도 매수할 수 없는 참된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호소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한 젊은이 다니엘을 보내시어 정의를 바로 세우게 하신다. 다니엘은 우리가 동화와 전설에서 자주 만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고발자인 두 원로에게 질문을 하여 그들이 자가당착에 빠지게 한다. 결국 다니엘은 그들의 음모와 거짓을 밝혀낸다.


힘 있는 자에게 항상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붙일 수 있는 적당한 제목은 무엇인가? 몇몇 성경주석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죄한 이의 승리”인가? 혹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인가? 이 제목은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가 붙인 제목이다.

그러나 수산나의 이야기는 무죄한 수산나의 박해와 그 명예 회복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권력욕과 복수욕 그리고 굴욕과 미성숙이다. 두 원로는 수산나와 함께 관능적인 쾌락만을 즐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주 힘 있는 사람임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하여 수산나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수산나를 제거하려고 했다.

수산나는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원로들의 강요를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잠자리를 할 경우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고, 이는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는 것, 곧 “자기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르테 죌레)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산나의 이런 저항은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곧 ‘아니오’라고 말하는 거절과 저항의 용기는 자기 자신을 꼼짝 못할 곤경에 빠뜨리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덕행이다. 현대인에게도 많은 이기심, 곧 욕망과 탐욕과 권력욕의 유혹 앞에서 이러한 용기의 덕행이 필요할 것이다.

원로들의 요구를 거절한 수산나는 간음죄로 고발당하여 법정에 세워졌다. 그러나 수산나의 진술은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수산나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 대변자는 바로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곧 수산나의 대변자가 되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힘 있는 자들 앞에서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분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여성만이 수산나와 같은 곤경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항상 성추행이나 성폭행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계속되는 문제는 힘없는 연약한 사람이 억압을 받고 악용되고 그 존엄이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내세우는 주장이 문제이며,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태도가 문제이다. 우리는 거짓 증언으로 나쁜 소문을 만들어 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사회의 변두리로 내쫓아 물질적인 궁핍에 시달리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정신적인 테러를 가해 한 사람을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다.

힘 있는 사람은 항상 원하는 것을 다 누리는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다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강자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산나의 이야기는 다르게 말한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죄악은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날 경우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느님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보시고, 진리와 거짓을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그분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인간을 자비롭게 대하시는 분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루카 1,51-52). 그분은 사악한 강자에 맞서시어 경건한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신다.


우리의 용기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 받을 수 없다고 기본권은 말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어느 누구도 그 존엄을 침해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열등하거나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수단과 도구로 전락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른바 남반구인 제3세계나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된 곳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을 짓밟고 억압하고 약탈하는 모든 죄악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이런 저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눈과 귀를 활짝 여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얕잡아보고 학대하는 불평등은 아직도 가볍게 여겨지고 적당히 얼버무려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이웃이나 공동체의 구성원에 관한 험담이나 나쁜 소문을 퍼트려서도 안 된다. 조심성 없는 입소문에서 많은 명예훼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수산나가 젊은 다니엘과 같은 대변인을 찾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 약자들 편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약자들에게 보내시어 불의에 맞서 저항함으로써 그들의 대변인이 되길 바라신다. 우리 모두는 약자들을 대변하는 다니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격려와 도움과 연대로 약자들이 곤경에서 벗어난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쌍백합, 제39호, 2012년 겨울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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