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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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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2 조회수1,379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

 

 

악의 기원은 하느님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창세기 앞부분의 이야기는 ‘은혜롭고 아름다운 세상과 인간의 창조 이야기’에 이어 ‘인간의 죄악상(罪惡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세상을 맡겨주신 하느님과의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잘못의 역사’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창세기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저자는 매일 매일 유혹이 끊이지를 않고 쉽게 죄에 떨어지고 마는 현실 속에서 ‘악의 기원을 하느님께 두려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혹은 자신을 내신 하느님께 전가하려는 태도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만연해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태도와 생각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나아가 하느님을 부정하고 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악의 현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악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악은 결국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잘못되고 왜곡되어 시작되었다는 것, 인간은 하느님을 불신하고, 나아가 하느님처럼 되어 보려는 오만한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시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6,5-7) 이어지는 창세기 6장 이하의 홍수이야기는 인간의 창조를 후회하시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느님께서 후회를 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실수로 만드셨겠습니까?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고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인간의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내리신 하느님이시지만 그 다음 어떠하셨나요? 노아의 가족만은 살려주시고 그를 통해 제물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8,21)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와 새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9,11)

 

이렇게 창세기는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 널리 퍼져 있었던 ‘길가메쉬 서사시’ 같은 홍수설화를 이용하되,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아와 통회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시는 홍수를 내리시지 않겠다고 뉘우칠 정도로 인간에 대해 끊을 수 없는 연민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심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리고 통회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응답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는 우리 단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노아의 두 아들

 

창세기의 저자(야훼계)는 홍수 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하는 노아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인간의 본성에 깊이 파고 든 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로 말하자면 포도밭을 가꾸는 첫 농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자신의 천막 안에 누워 있었는데, 그것을 본 ‘함’이 밖에 있던 두 형제에게 알렸고, 이에 ‘셈’과 ‘야펫’이 조심스럽게 겉옷을 덮어드렸다고 합니다. ‘함’이 술에 취해 누워있던, 그것도 자신의 천막 안에 잠들어있던 아버지의 부끄러운 면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선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형제들도 알도록 계속 전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아버지인 노아는 실상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어떤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에게까지 웃음거리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이 셋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온 땅으로 사람들이 퍼져 나갔다.”(창세 9,18.19) 이 이야기에서 잘못된 아들로 나타나는 ‘함’의 이름은 에집트인들이 가졌던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함이라는 이름 자체가 함이 아브라함의 후손들과는 다른 출생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하는 셈이지요. 창세기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노아의 아들인 ‘함’이 어떻게 이방민족인 가나안 족의 조상이 되었던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창세 9,24-26ㄱ) 아버지의 알몸을 존중한 아들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축복이 따랐던 반면에, 그렇지 않은 아들에 대해서는 저주가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아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는, 죄를 범하기 전에는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 피조물로서의 본질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의 사슬에 얽매이게 된 것, 그러한 현실의 아픔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한 말씀이 “그들은 (셈과 야펫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창세 9,23ㄴ)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에서 태초의 사람이 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창세 3,10-11)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남의 흉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감싸주기보다 먼저 욕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다른 이에게 계속 나발을 불어대길 좋아하는 우리의 악한 면, 혹은 모순되는 면을 꼬집어 전하고 있다 싶습니다. 내가 남의 허물과 실수에 대하여 관대하지 않고,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거나 비난거리나 가십거리, 혹은 이야깃거리나 안주거리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훗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그것이 밝혀지게 되어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그것에 관해 내가 흉본 그 사람에게 종보다도 못한 신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남의 얘기하길 너무 좋아하지 맙시다. 남의 흉보는 일은 더 삼가려고 애씁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늘 듣고 계시고, 안 들어도 아십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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