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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25 조회수6,560 추천수1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

 

 

성경에는 10여 명이 넘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생각보다 많죠?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의 양부(養父)와 더불어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인물이 가장 유명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두 인물을 연결하셨는데, 이 둘 사이에는 이름 말고도 꿈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요셉은 야곱과 라헬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입니다. 그 이름은 야사프라는 히브리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던 언니 레아가 아들을 넷이나 낳을 동안 아들을 하나밖에 낳지 못한 라헬이 하나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더 많은 아들을 기원하는 이름입니다.

 

어린 시절의 요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창세기 37장을 읽어봅시다. 먼저, 우리말 성경 번역에는 생략되었지만, 37,2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요셉이 소년이었다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소년은 히브리어로 나아르인데, 이 단어는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 나일강에서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탈출 2,6에서처럼 갓난아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17세였는데도 나아르로 불린다는 사실은 그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성숙한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로 팔려 가기 전 요셉의 행동은 철없어 보입니다.

 

37,2은 요셉이 형들의 나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고 하는데, ‘열두 족장의 유언’이라는 외경은 그 내용이 형들이 키우던 양을 잡아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외경에서 야곱의 아들 가운데 가드는 유언하면서 요셉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양을 잡아먹으려는 곰과 맞서 싸워 결국 구해냈지만, 이미 양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라 그 양을 잡아먹었는데, 그것을 두고 요셉이 아버지께 멀쩡한 양을 잡아먹었다고 거짓말했다고 불평합니다. [2021년 4월 25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2)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요셉의 철없는 행동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서 비롯됩니다. 37,3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이유를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늦둥이가 다 큰아들들보다 귀엽긴 했겠죠. 그런데 사실은 야곱의 편애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곱은 그를 위해 20년 동안 고된 머슴살이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사랑한 아내 라헬을 똑 닮았기에 요셉을 편애한 것으로 보입니다(29,17). 라헬이 낳아준 아들은 요셉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는데 열두 아들의 막내인 벤야민입니다. 그런데 요셉보다 막내아들을 더 귀여워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낳다가 라헬이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후에야 벤야민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44,20).

 

37,3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입힌 긴 저고리는 여러 색으로 염색한 매우 고가의 천으로 만든 소매와 단이 긴 겉옷을 가리킵니다. 이 옷을 입고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이것은 요셉에게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야곱의 편애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발굴된 족장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무덤의 벽화는 이 의복이 히브리 민족이 속한 셈족 족장의 복장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즉, 야곱은 요셉을 마치 형들을 다 제치고 그의 뒤를 이어 족장이 될 장자권을 가진 아들처럼 대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야곱이 장자권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옷 때문에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죠. 이 옷이 어찌나 싫었던지 형들은 나중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길 때 염소 피를 묻혀 그가 죽은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아버지를 속이는 데 사용합니다. 마치 야곱이 그 옷을 바라볼 때마다 요셉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듯이 말이죠. 이렇게 해서 형 에사우의 옷으로 아버지를 속인 야곱이 이제는 아들들에게 요셉의 옷으로 속게 됩니다. [2021년 5월 2일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3)

 

 

야곱의 편애에 대한 형제들의 질투와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요셉의 두 꿈입니다. 곡식 단의 꿈과 해와 달과 별들의 꿈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꿈이 신의 계시를 받는 가장 신뢰할만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꿈은 종종 특별한 해석이 필요한 상징들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두 꿈은 해석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료해 보여서 형제들이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곧, 부모 형제가 모두 요셉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신세가 된다는 예언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그래서 형들의 요셉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집이 있는 헤브론에서 117~141㎞나 떨어진 스켐에서 양을 치던 형들을 찾아갑니다. 아마 요셉은 닷새 정도 걸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절은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비가 내리는 우기와 메마른 건기로 나뉩니다. 10월부터 4월까지의 우기에는 어디에나 식물이 자라 거주지 근처에서 방목했지만, 그 외의 건기에는 목초지를 찾아 멀리까지 가곤 했기에 이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참고로 이때 양을 친 목적은 고기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주식은 흔히 상상하듯 고기가 아니라 빵과 치즈였습니다. 고기는 주로 잔치 때 먹었는데, 이 고기를 먹으려면 레위기 3장과 7장에 나오는 친교제 혹은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친교가 아니라, 동물의 피를 땅에 쏟아 부정하게 만들기 전에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 그분과 친교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식인 빵을 만들기 위해 유다 광야 곳곳에 밀 씨를 뿌렸습니다. 밀 농사를 지으며 동시에 양을 친 것입니다. 양은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으로 털과 젖을 얻기 위해 길렀습니다.

 

37,14을 근거로 볼 때,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낸 이유는 그들이 양을 잡아먹지는 않나 감시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스켐에서 형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20㎞가량 떨어진 도탄으로 가서 형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형들이 힘들게 일하는 자신들을 감시하러 오는 요셉을 환대할 리가 없습니다. [2021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4)

 

 

요셉은 형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갇히게 되는데, 이 구덩이는 우기에 내리는 비를 저장하는 물 저장고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에 물이 마르면 임시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예레 38,6 참조).

 

고대 근동에서 향을 거래하는 상인들은 남부 아라비아에서 시나이반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동서 무역로를 통해 왕래했는데, 도탄은 이 무역로 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노예로 삽니다. 여기 등장하는 상인들은 이스마엘인으로도 나오고 미디안인으로도 나오는데(37,28), 판관 8,22-24에 따르면 둘은 동일 민족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원래는 다른 민족인 미디안인들이 이스마엘인들에게 흡수 통합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이들이 요셉을 노예로 사는데, 노예 거래는 고대 근동에서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였으며 자유를 얻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분노한 형제들 사이에서 요셉을 살리려 노력하는 의로운 인물이 르우벤으로도 나오고(37,21-22) 유다로도 나오는데(37,26-27), 이것은 두 개의 다른 문헌이 섞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북 이스라엘에서 생겨난 엘로히스트 전승은 북 왕국에 속한 지파 가운데 맏이인 르우벤을, 남 유다에서 생겨난 야휘스트 전승은 유다를 자비로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요셉의 몸값은 약 2년간의 일당에 해당하는 은 20세켈인데, 이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보통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 랍비들은 요셉의 형제들이 이 돈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신을 샀다고 합니다. 아모 2,6의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근거로 한 해석입니다.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으로 요셉의 죽음을 알립니다. 이렇게 평생 남을 속여먹었던 야곱이 이제 자기 자식들에게 속습니다. 37,34에서 야곱이 보이는 행위는 전형적인 애도의 행위입니다. 애도의 시기에 입는 자루 옷은 염소나 낙타 머리털로 만든 매우 거칠고 불편한 옷으로서 허리와 엉덩이만 가릴 수 있었습니다. 애도 기간은 일반적으로 30일이었으나 슬픔이 크면 더 연장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5월 16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5)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 대장 포티파르에게 팔립니다. 포티파르는 ‘라의 선물’이라는 뜻인데, 라는 이집트의 최고 신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이방 신들이 다스리는 땅으로 팔려 왔지만, 그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은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진 고대 근동의 신들과 달리 하느님은 특정 지역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심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그러하셨듯이 요셉에게도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 덕분에 요셉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포티파르의 음식 외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음식 관리에서 제외된 까닭은 이집트 관습 때문일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식사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음식을 나눠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이방인의 손에 음식 준비를 맡겼을 리 없습니다.

 

37,6은 요셉의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유다 전승은 이집트 공주들이 요셉을 보기 위해 담을 넘고 그가 지나갈 때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와 반지 등 보석들을 던져 관심을 끌려 했다고 합니다.

 

결국, 요셉의 외모 때문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는데, 요셉이 이를 뿌리치자 앙심을 품고 모함을 하여 옥에 갇히게 한 것입니다. 요셉이 간음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단지 포티파르의 전폭적인 신뢰를 저버리는 일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39,9). 즉, 요셉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된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듯이, 요셉이 지금은 신앙 때문에 시련을 겪지만, 나중에는 이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요셉 본인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재상이 될 뿐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도 기근으로 인한 아사의 위기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파라오의 헌작 시종과 제빵 시종이 그곳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하찮은 종이 아니었습니다. 헌작 시종은 이집트 왕궁의 고위 관료로서 파라오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과 음료에 독이 들어있는지 검사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파라오의 신뢰가 두터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빵 시종은 많은 종류의 빵과 케이크를 알고 있는 미식가로서 파라오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2021년 5월 23일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6)

 

 

두 시종이 같은 밤에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그 꿈들을 해석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신들이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고 믿었고, 특히 파라오나 중요한 인물들의 꿈은 나라의 운명과도 관계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 신성한 꿈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꿈 해석의 원리와 예를 기록한 책이 있었고, ‘생명의 집’이라 불리던 곳에 모여 해몽을 연구하는 이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꿈에 술잔이 등장하는 것은 명성을 얻거나 후손을 보는 것을 상징하고, 머리 위에 과일을 이고 있으면 슬픈 일이 생기는 것을 의미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꿈풀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40,8). 이것은 꿈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꿈도 하느님한테서 오고, 그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헌작 시종의 꿈은 그의 복직을, 제빵 시종의 꿈은 그의 교수형을 의미하는 꿈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어느날 파라오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해몽 전문가들인 요술사와 현인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헌작 시종이 그동안 잊고 있던 요셉을 기억해 내고 추천합니다. 파라오 앞에 나서기 전 요셉은 수염을 깎습니다(41,14). 가나안인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수염을 깎지 않았습니다. 특히 콧수염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이집트인들은 모두 면도를 했고, 오직 파라오만이 수염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수염을 깎았다는 것은 이집트인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파라오 꿈의 배경이 나일강인데요, 이 강은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수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6,650㎞)입니다. 이집트는 매년 긴 거리를 이동하며 비옥한 토양을 실어 오는 나일강의 규칙적인 범람 덕분에 풍요로워 이집트뿐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 전체의 곡창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일강의 등장은 파라오의 꿈이 이 세계의 곡창 지대에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실제 기원전 27세기의 ‘세헬 섬 비문’과 기원전 20세기의 문서 ‘네페르티의 환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간혹 나일강의 수위가 비정상적으로 내려가 기근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고왕국 시대(기원전 27-22세기)가 끝난 것도 극심한 가뭄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021년 5월 30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7)

 

 

요셉은 파라오의 꿈이 7년간의 대기근의 징조라고 설명한 뒤 국가 재난을 극복할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첫째, 국가 시스템을 재난 대비 체제로 바꾸는 것. 둘째, 풍년 7년 동안 매년 수확물을 1/5씩 사들이는 것. 셋째, 각 지방에 사들인 수확물을 적재하는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파라오는 요셉이 꿈 해석에 능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한 것을 알고 그를 이집트의 이인자인 재상으로 삼아 대기근의 대비를 맡깁니다. 41,42에서 파라오가 요셉에게 끼워준 인장 반지는 사각형이나 타원형 안에 파라오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로서 파라오의 권위를 물려받았음을 상징하는 도장입니다. 이집트 역사 전체를 봐도 요셉처럼 높은 지위에 오른 이방인은 없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름이 바뀝니다(41,45). 요셉의 이집트 이름인 차프낫 파네아의 뜻은 정확하진 않지만 ‘신은 말하고 살아 있다’ 혹은 ‘아는 자’ 등으로 추측합니다. 기원전 13세기 메렌타 파라오 때에도 셈족 고위 관료의 이름을 이집트식으로 바꾼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헬리오폴리스의 온 신전의 사제 포티페라(태양신 레가 준 사람)의 딸 아스낫(낫 여신에게 속한 여인)과 결혼합니다. 이 가문은 이집트에서 멤피스의 프타 신전의 사제 가문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사제 가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이집트에서 가장 강한 정치 권력과 동시에 종교 권력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요셉은 하느님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도우시리라는 것을 파라오의 꿈 내용을 듣기도 전부터 확신했고(41,16)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므나쎄(우리말 성경은 이 이름의 유래를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문장은 이사일의(二詞一意), 즉 두 단어를 연결하여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하느님께서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의 모든 고생을 잊게 해 주셨구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와 에프라임 두 아들의 히브리식 이름에 담습니다(41,51-52). [2021년 6월 6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8)

 

 

사실 요셉은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의 꿈 해석이 틀렸다면, 7년 동안 곡식을 사들이면서 왕실 경제를 파탄을 내 왕권을 약화한 대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지 못했다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이집트에서 7년의 풍년이 끝나고 대기근이 시작됩니다. 이 기근은 단지 이집트에만 닥친 것이 아니라, 온 근동 지방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본디 가뭄이 자주 들던(사실 치수에 대한 지식이 없던 고대에는 거의 모든 지역이 종종 가뭄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살던 야곱 집안도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들들을 이집트에 보내 곡식을 구해오라고 시키는데, 벤야민만 쏙 뺍니다. 여기서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낳은 유일한 아들(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므로) 벤야민에 대한 그의 편애가 드러납니다(42,4).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셉을 만난 형들이 그에게 절을 할 때 요셉이 어린 시절에 꾼 두 꿈이 실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그보다 더 큰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셉을 통치자이자 곡식을 나눠주는 이로 묘사하는 42,6이 그 꿈의 진정한 실현이라 생각됩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한 꿈은 그가 이집트에서 갖게 될 큰 권위를, 곡식단들이 그에게 절한 꿈은 그가 이집트인뿐만 아니라 온 근동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줄 일을 미리 보여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요셉의 꿈을 부모 형제 모두가 그에게 절을 하게 될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썩 적절치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에게 절을 하지 않고, 어머니 라헬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다시 만나 기분이 좋을 리 없던 요셉이 여러 번 반복해서 그들을 염탐꾼으로 모는데, 고대에도 타국의 정보를 염탐하여 자국을 이롭게 하는 첩자들이 있었습니다. 의심받지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닐 수 있는 상인들이 주로 첩자 노릇을 하곤 했습니다.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9)

 

 

요셉의 형들은 첩자의 혐의를 벗기 위해 자신들은 정직하며 다만 양식을 구하러 온 한 가족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문장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어찌나 겁이 나고 다급한지 접속사도 사용하지 않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숨도 쉬지 않고 그 긴말을 재빨리 뱉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42,10ㄴ-11).

 

그런데도 요셉이 형들의 말을 믿지 않는 척을 하자, 형들은 그들 말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인 가족 관계까지 밝히게 됩니다(42,13). 그런데 조금 전 자신들의 정직함을 주장한 이들이 여기서 요셉은 단지 없어졌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요셉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터에 자신들의 추악한 죄를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겠죠. 어쨌든 이렇게 형들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고백할 기회를 또 놓치고 맙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회개할 한 번의 기회를 더 줍니다. 형제들 가운데 시메온을 인질로 붙잡고 나머지 형들을 보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형제 벤야민을 데려오게 한 것이다. 이제 형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이들은 다시 한번 형제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형제를 구하기 위해 돌아올 것인가?

 

어느 쪽도 선택이 쉽지 않은 궁지에 몰린 형제들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42장 21절과 22절은 형제들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21절에서 형제들은 모두 요셉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이 불행한 사태가 닥쳤다고 하는데, 22절에서 르우벤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르우벤은 37,21에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말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하는 말이 르우벤에게 훨씬 유리합니다. 이 와중에도 르우벤은 맏이로서 동생들의 잘못된 행위를 말리지 못한 것을 뉘우치기는커녕 자기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0)

 

 

요셉은 형들의 곡식 자루에 그들이 곡물값으로 치른 돈을 다시 집어넣어 더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이제 형들은 곡식을 정당하게 산 것이 아니라 몰래 훔쳐 나온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대 사회, 특히 근동 지방에서 싸움은 거의 식량 때문에 일어났을 정도로 곡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었기에 이것은 보통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런데도 형들이 시메온을 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다가온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올 것인가 두고 볼 참입니다.

 

참고로 기원전 6세기까지는 주조된 돈이 없었고, 귀금속, 보석, 향신료나 향 등의 무게를 달아 돈처럼 사용했습니다. 가치는 희소성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이집트에는 은광이 없어 은이 높은 가치를 가졌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들은 곡식 자루 안에 돈이 있음을 이미 알았으면서도(42,27-28), 마치 야곱 앞에서 자루를 열 때 처음 안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42,35). 시메온이 이미 잡혀있는 데다 벤야민까지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자기들 때문이 아니라 이집트의 폭군 때문에 초래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혹시라도 야곱이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한 행위로 보입니다. 자신들을 요셉의 술수에 속은 무고한 피해자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도 자신들의 행위는 어떤 흠도 잡힐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요셉 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강조함으로써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벤야민을 이집트로 데려가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임에도 그들에게는 야곱 앞에서 무고함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들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야곱은 모든 일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고 시메온을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며 벤야민이라도 지키고자 합니다. 르우벤이 제 두 아들의 목숨까지 걸며 벤야민의 안전을 장담해도 야곱은 시메온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막내 아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야곱의 편애가 또다시 드러납니다. 항상 다른 곳만 바라보는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들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1)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은 다시 식량을 구할 유일한 장소인 이집트로 아들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 가운데 유다가 대표로 나서서 벤야민이 함께 가야 양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43,3에서 벤야민이 없으면 요셉을 만날 수조차 없다고 하는데, 사실 요셉은 형들이 벤야민 없이 돌아오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세 42,20).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을까 봐 겁에 질린 야곱을 자극하지 않고 설득하기 위해 유다가 말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43,7에서 아들들이 야곱에게 한 말은 자기들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거짓말입니다. 요셉은 다만 그들을 염탐꾼으로 의심했는데, 형들이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친 형제들임을 강조하기 위해 가족 관계를 모두 밝힌 것입니다(창세 42,9-13).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벤야민을 요셉에게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죠.

 

유다가 이대로는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벤야민을 무사히 데려올 것을 장담하자 야곱은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게 됩니다. 야곱은 위험을 조금이라 줄이기 위해 가나안의 특산품과 고가의 수입품들을 선물로 준비시키고 곡식값도 두 배나 치르게 합니다. 물론 이전에 치러야 했던 곡식값도 다시 챙겨 보냅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것을 지시하면서 7번이나 동사의 명령형을 사용하는데 이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반드시 지시대로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걱정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43,13에서 야곱은 벤야민을 ‘너희 아우’로 불러 혈육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벤야민에게 특히 신경을 쓸 것을 우회적으로 부탁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에서는 시메온만 ‘너희의 형제’에 포함하고 벤야민은 이름을 따로 부릅니다. 역시 야곱에게 벤야민은 다른 아들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듯하죠.

 

야곱은 처음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낼 때는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43,14). 여기서 야곱이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 즉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권능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야곱은 감히 인간이 이래라 저래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합니다. 다시 말해, 오직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자비를 베푸실 때에만,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아들들이 무사히 식량을 갖고 돌아올 수 있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021년 7월 4일 연중 제1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2)

 

 

드디어 요셉은 벤야민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 43,29은 벤야민이 요셉의 친어머니의 아들, 즉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43,29). 그러니 요셉에게 벤야민은 다른 형제들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벤야민만을 축복하고 그를 만난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음식도 다른 형제들의 다섯 배나 많이 줍니다. 그런데 요셉의 분명히 차별적인 처사를 두고 형들은 벤야민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변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창세 43,32는 고대 이집트의 식사 관습을 보여주는데, 이집트인들은 자신들 외의 민족을 부정한 자들 혹은 심지어 사람이 아닌 것으로까지 여겼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집트를 정복하여 왕조까지 세운 적이 있는 힉소스인들이 속한 셈족에 대해서는 더 배타적이었는데, 히브리인도 셈족에 속합니다.

 

이번에도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이전에 썼던 속임수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은 돈뿐 아니라 은잔까지 곡식 자루에 넣는 것입니다. 은잔을 훔치는 것은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은잔은 점치는데 사용된 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 따르면 잔에 물과 기름을 담아(물에 기름을 붓거나 기름에 물을 붓습니다) 물 위에 뜬 기름의 모양을 보거나, 잔에 물만 담아 거기 비친 형상을 보고 전쟁과 평화, 성공과 실패, 임신과 불임, 병과 회복 등의 점을 친 것 같습니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는 이렇게 점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요셉이 은잔을 이용해 점을 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 44,9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 자루에서 잔이 발견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종이 되겠다고 맹세까지 하는데, 고대 이집트 법에 따르면 무죄를 주장하는 피의자는 자신의 범죄가 입증될 경우 받을 형벌을 맹세의 형태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관리인은 벤야민이 죽게 할 수는 없었기에 잔을 훔친 사람만 종이 되라고 형벌을 낮추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제들에게 또 다른 시험이 됩니다. 자유로워진 형제들은 처벌 받을 한 사람만 두고 떠날까요? [2021년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3)

 

 

요셉의 이러한 처사는 소심한 복수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잘못을 깨닫게 하여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용서는 잘못을 그냥 덮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죠.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한 형제들은 변합니다. 그 결과가 원하던 식량을 얻었음에도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벤야민을 버리지 않고 그와 함께 벌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심지어 그 대신에 벌을 받으려고까지 합니다.(창세 44,33)

 

유다는 조작된 증거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밝혀내셨다고 합니다.(44,16) 이것은 당연히 은잔을 훔친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지은 죗값을 치르게 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유다는 언제 어디서고 반드시 죄를 벌하시고야 마는 하느님의 정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가 벤야민을 구하기 위해 요셉에게 간청합니다(44,18-34). 이 부분은 창세기에서 가장 긴 말씀입니다. 그만큼 유다가 절박하다는 의미겠습니다. 유다는 홀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함으로써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이로써 요셉의 마지막 시험을 훌륭히 통과합니다.

 

이 모습을 본 요셉이 더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형제들 앞에서 자기 정체를 밝히며 목 놓아 웁니다. 이것은 요셉이 이미 형들을 용서하였고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결국 야곱 가문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이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45,5)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다고 합니다.(45,8) 여기서 파라오의 아버지는 파라오보다 높다는 의미가 아니라 파라오에게 조언할 수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어지는 호칭들도 요셉이 파라오와 거의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한 나라의 구원자에게 과한 호칭은 아닌 듯합니다. [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4)

 

 

형제들과 화해한 요셉은 고센 땅을 내어주며 가문이 기근에 시달리는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하는데(창세 45,10) 이곳은 이집트 문헌에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가나안에 가까우며 방목하기에 좋은 땅인 하부 이집트의 델타 지역 동부에 있는 와디 투밀랏을 가리키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전에 형들에 의해 옷이 벗겨졌던 요셉은 그들에게 옷을 줍니다.(창세 45,22)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과 달리 벤야민에게는 다섯 벌의 예복과 은전 삼백 닢(그리스어로 쓰인 70인 역 성경에는 금전으로 나옵니다)을 줍니다. 이것은 벤야민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돈과 옷이 함께 나오는 곳은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기는 장면입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난 유일한 형제인(그래서 아마도 외모도 닮았을) 벤야민은 지금 예전 요셉의 자리, 즉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벤야민에게서 과거 요셉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옷이 벗겨진 채 돈에 팔렸던 요셉이 벤야민에게 옷과 돈을 주는 행위는 과거와의 화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전의 불행을 넘치게 갚아 주셨으니 형들은 이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문의 이집트 이주를 마친 요셉은 이제 진정으로 자기 삶의 터전이 된 이집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비축해둔 식량 판매를 통해 왕실 재산을 엄청나게 불리죠. 기근은 길게 이어졌고 식량을 살 돈이 떨어진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통해 양식을 구합니다. 백성들이 가진 것을 다 팔고 결국, 모든 땅까지 팔고서야 기근이 끝이 납니다.

 

이렇게 요셉은 사제들의 농토를 제외한(사제들은 파라오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에 땅을 팔 필요가 없었습니다) 온 이집트 땅을 파라오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꼭 국가적 재난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농지를 착취한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요셉이 이처럼 한 것은 단지 파라오의 부를 증대시켜 왕권을 견고케 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뿐 아니라 토지의 국유화를 통해 일관성 있는 토지 관리 정책을 펼쳐 앞으로 비슷한 재난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식량 공급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앞으로 가나안에 살 후손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집트는 기근이 자주 드는 가나안의 곡창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셉은 먼 후손들의 먹거리까지 마련한 것입니다. [2021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요셉 (15)

 

 

시간이 흘러 죽음을 앞둔 야곱이 유언을 하는데요(창세 49장), 다른 형제들과 달리 요셉에게 하는 축복에만 하느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복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므로, 엄밀하게는 이것만이 진정한 축복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이 축복대로 요셉의 아들인 에프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파가 됩니다.

 

요셉은 110세까지 살면서 삼대까지 후손을 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의 징표입니다. 참고로 성조들의 수명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 175세=5*5*7, 이사악 180세=6*6*5, 야곱 147세=7*7*3. 이렇게 분석하면, 아브라함(5+5+7=17), 이사악(6+6+5=17), 야곱(7+7+3=17) 모두의 이름 안에 17이라는 수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 야훼의 다른 형태인 의 철자를 숫자로 바꾸어 다 더하면 17입니다. 다시 말해, 성조들의 수명 안에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조들의 삶 내내 그들과 함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의 수명 110세를 분석하면 5*5+6*6+7*7*1인데, 이 안에는 17이라는 숫자는 없지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수명에서 반복되는 숫자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성조들의 맥을 이을 뿐 아니라 당연히 그들과 함께하셨던 하느님께서 요셉과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요셉은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으로 옮겨 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시신은 관에 담기는데,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계약의 궤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나중에 요셉의 관은 계약의 궤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죠. 그의 유언대로 요셉은 죽어 이집트에 묻히지만, 출애굽 때 후손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가 안식을 찾게 됩니다. 결국 타의에 의해 떠나야만 했던 고향으로 수백 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죠.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철부지 도련님에서 이방인 노예로, 거기서 당시 세계 최강국의 재상이 되기까지 요셉의 삶은 성조들 가운데 가장 극과 극을 오갔습니다. 요셉은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는 역경 중에도, 반대로 부귀영화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도, 그 어느 때라도 하느님을 잊지 않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2021년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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