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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성서 이야기3: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23 조회수3,210 추천수0

[함께 가는 길 – 성서 이야기] (3)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과연 누가 먼저 전해 주었을까? 복음이 쓰이기 전에 구전으로 전해진 주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누군가에게 감동의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깊이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던 일일 것이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지상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다. 주님께서는 그 사명을 온 힘과 마음으로 생명을 다하기까지 이루어 내셨다. 제자들은 삶이 사랑으로 가득했던 주님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기억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잘 드러났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의 단어가 나온다. 우리말로 번역된 ‘가엾은 마음’과 ‘속이 북받치셨다’라는 말이다.

 

‘가엾은 마음’으로 번역된 그리스말은 심장이나 폐, 간과 같은 신체 부위를 뜻하면서 몸속 장기로 느껴 가여워한다는 뜻, 애가 끓는다는 뜻으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뜻한다. 즉 측은한 마음이 들고, 가엾이 여기는 상태, 내장이 움직여 창자가 뒤틀리고 참을 수 없게 된 결과로 드러나는 사랑을 말한다. 애간장이 녹고, 끊어지고, 창자가 꼬이고 뒤집혀서 생기는 것으로 애끓는 사랑이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는 그냥 ‘가엾은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이 용어는 공관복음에만 12번 정도 쓰였다.

 

예수님께서 ‘모든 마을과 고을을 다니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는데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마태 9,35-36) 가엾이 여기시는 사랑을 드러내신다. 오 천명이나 되는 배고픈 큰 무리를 보셨을 때에도(마태 14,14),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셨을 때에도(마태 20,34), 온몸이 뭉그러진 악성 피부병(나병 환자)을 보셨을 때도(마르 1,41) 그렇게 애끓는 가엾은 사랑으로 대하셨다. 이 애끓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몸소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가 반겨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애가 타고 속이 끓는 사랑으로 기다린 아버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임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루카 15,20). 이 가엾은 마음, 애끓는 사랑은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도 잘 드러난다. 주님께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매고 나오는 상여 행렬과 마주치신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관에 손을 대시며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시고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1-17). 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자 예수님의 간장이 떨리고, 장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셨다고 전해 주는 말씀이다. 이는 장차 당신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때 겪으실 성모님을 염두에 두신 아픈 사랑이었을 것이다.

 

‘속이 북받치셨다.’라는 용어는 복음서에 5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소경과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을 때(마태 9,30; 마르 1,43), 향유를 부은 여인에서 사람들이 ‘나무랐다’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마르 14,5).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타를 사랑하고 계셨다. 라자로가 죽은 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셨는데 마리아가 울고 마리아와 함께 온 유다인들이 우는 모습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11장). 예수님께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속이 북받치셨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의 본래 의미는 ‘생명이신 분이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광경을 보시고 그 원인이 되는 악에 분노하는 마음, 세상이 어둠의 세력에 눌려 사는 모습에 통분하셨다’는 의미라 하겠다. 달리 말하면 ‘신심과 영에 충격을 받으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엄중한 모습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죽음과 싸움에서 승전보라도 외치시듯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으셨던 생명이신 하느님의 외침에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께 순명이라도 하듯 라자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요한 11,44) 주님과 둘러있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신 놀라운 표징으로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기적과 표징의 원동력이 되는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요한 3,16)를 보여주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사랑이다. 그리고 세상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훗날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중에 자신들의 발에 닿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주님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고 예수님의 모든 일에 앞서 지니신 그 마음, 그 사랑을 오래 기억하였을 것이다.

 

[2022년 7월 24일(다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원주주보 들빛 5면, 김경랑 귀임마리아 수녀(복음화사목국 성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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