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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신문] 뉴에이지 가톨릭 신자 피해 많아. 성직자도 실태 몰라 방치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재홍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23 조회수1,328 추천수2 신고

가톨릭 신문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 /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1

 

 

 

 

 

차동엽 신부(가톨릭대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가톨릭 신자 피해사례 가장 많아

성직자도 실태 너무 몰라
“목마름에 지친 신자 방치”

십 여 차례에 걸쳐 지구화, 정보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다원문화 등 4대 메가트렌드의 관점을 주유하면서 「한국 가톨리시즘의 현재」를 조명해 봤다. 그 노정에서 다원문화의 지대에 이르러 지리(支離)하다 할 만큼 오래 체류하였다. 더 살펴봐야 할 영역들이 있지만 다른 주제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쯤에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해야 할 듯 하다.

약속대로라면 이어지는 여정은 「한국 가톨리시즘의 부활을 위한 길」, 「한국천주교회 선조들의 위대한 신앙」,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 「가톨릭교회의 세계관(신관, 우주관, 인간관)」 순(順)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앞의 두 영역에 앞서 뒤의 두 영역 언저리를 먼저 배회한 꼴이 되었다. 하여 내친김에 일정을 수정하여 우선 나중의 두 가지를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릭 신앙」으로 묶어 일별하고 나서, 예정된 나머지 차례를 따르고자 한다.

방황하는 양떼, 방관하는 목자

다원주의 시대에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벤쳐기업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다. 나중에 별도로 용어풀이가 있을 터이지만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일찍이 칼 막스가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가면, 팔아먹을 수 없는 것까지 팔아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던 대로 자본주의 말기에 나타난 무차별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21세기 상업주의는 마침내 인간의 종교심을 수요로 삼아 새로운 구원재(救援財)를 개발·공급하면서 무한한 시장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신흥영성 시장」에는 별별 상품들이 즐비하다. 평화, 행복, 성공, 건강, (인생)상담, 문화, 웰빙 등등 품목별로 오만가지 제품들이 출시되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많은 기성종교의 신앙인들이 종교적인 욕구를 더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에서 충족시키지 않고, 이들 「쉽고」 「재미있고」 「편리한」 종교적 대체물(religious alternative)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들로 대리충족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의 최대 피해자는 가톨릭교회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노길명 교수는 가톨릭 언론매체를 통하여 신흥영성운동의 대표적 상품에 속하는 기 수련 참여 실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이러한 기 수련에 몰입하는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보다 가톨릭 신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톨릭이 체계화된 교리와 전례 중심의 종교이다 보니 영적인 욕구와 종교체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사실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를 기 수련을 통해 보상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은 필자도 다양한 사목현장의 교우들을 만나면서 거의 매일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은 신앙정체성이 분명해서 덜 휘둘린다. 또 부흥회, 사경회, 수양회, 철야기도 등 영적 메뉴가 다양해서 그리 한 눈 팔 겨를도 없다.

대조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욕구와 신앙체험의 갈증을 해소할 영적 프로그램의 부족을 원망하며 교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방황하기 일쑤이다. 그 위험성과 해악에 대해 특별한 경각심이 없는 정도는 약과요 아예 심하게 매료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래에 옮겨보는 근래에 가톨릭 언론매체에 실린 교우들의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현실인식이 필자만의 주관적인 착각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고도 남는다.

-일산에 사는 김 소화데레사(59): 『미국에서 살 당시에 만났던 뉴 에이지 활동가들은 느낌이 굉장히 신선하고 좋았어요. 내가 갖지 못했던 용기를 갖고 있었던 것 같고, 특히 정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죠』

-서울대교구 ㅇ본당 신자 박 안나(27): 『뉴 에이지가 어때서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뉴 에이지라는 조지 윈스턴의 「겨울(DECEMBER)」이나 영화 「사랑과 영혼」 등의 작품들은 좋기만 하던데요』

-서울대교구 ㅅ본당 신자 이 프란치스코(47): 『잘 사용하면 좋지 않아요? 요가나 명상법 같은 건강법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이처럼 가톨릭 신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시쳇말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좋은 마음들만 가지고 산다.

목자들은 어떠한가? 목자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는 「신흥영성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 미국의 교포 신자들에게서도 드물지 않게 온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일차적으로 「본당 신부님」에게 문의를 해보고 나서 여전히 답답한 것이 남아서 수소문 끝에 필자에게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들은 신부님들이 그 실태에 대하여 너무들 모른다고 하소연한다. 알아도 과소평가하며 천하태평이라고 불평한다. 또 모르면서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요컨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떼들은 방황하고 목자들이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가 처한 평균적이며 비극적인 현실인 것이다.

피해사례

몰라서 그렇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은 심각한 영적 부작용을 초래한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이들은 최소한의 실례들일 뿐이다. 신자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불량 음식을 먹고 병들고 있다. 이는 정확한 현실이다. 결코 필자의 과민인식이 아니다. 목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통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5~6).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 /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2

 

 

교회 지도층도 빠져들기 일쑤

프로그램 시 음악 사용 흔해
정확한 정보 부족 탓 일수도

용어의 문제

먼저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이미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일본의 종교사회학자 시마조노 스스무가 뉴에이지 운동 및 일본과 한국에서 생겨난 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영성운동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도입한 용어이다. 한국에서는 노길명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필자도 글과 강의를 통하여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신영성운동」이라는 이 용어를 처음 접하는 교우들과 사제들은 뭔가 혼돈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무슨 좋은 영성프로그램이 나왔는가 보다』하며 기대감이나 호기심을 가졌는데 나중에 대강 실상을 파악하고 보니 「위험한」 사이비 영성이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영성운동」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 것이냐 하는 반문을 해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것이 용어문제에 대하여 재고하게 된 연유이다. 그 결과 「신영성」 대신에 「신흥영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러 종교 현상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종교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용어는 별로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성 종교의 범주 밖에서 새로운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이 시대 영성의 현상을 「신영성운동」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새로운 형태의 영성 현상은 결코 「새로운 영성」 곧 신영성(新靈性)이 아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영성」이 아니라 과거 여러 종교에서 이미 있어왔던 것을 혼합하여 새롭게 「붐」을 타고 있는 영성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新) 곧 「새로운」이라는 표현 대신에 신흥(新興) 곧 「새롭게 부흥하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신흥영성운동」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신흥종교」와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궤를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 「(뉴에이지)」를 추가한 것은 뉴에이지가 신흥영성운동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가톨릭교회 내의 다원적 반응

이제 본 주제로 돌아와 보자. 지난 번에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응과 폐해에 대하여 언급하던 참이었다. 마저 얘기해 보자.

언급하였듯이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흥성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내의 반응도 다원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신자들의 태도가 다원적이다. 지난 호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수가 중심을 잘 잡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남은 자」(1열왕 19,18)들이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써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온 자매님의 열심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노베르또신부님. 저는 미국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 김율리엣다입니다. 괴상한 「마음수련」이라는 것이 한인 신자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이곳 동부까지 왔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신부님의 글을 성모기사지에서 발견하고 여러 장 복사하였습니다. 우선 레지오 단원들에게라도 교육을 시킬까 해서요. 괜찮겠지요?

제가 지금 글을 드리는 것은 000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인터넷 상에서 약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아무리 보아도 뉴에이지와 비슷한 부류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본당사목회 교육부 주관으로 이틀씩 두 번에 걸쳐서 000세미나를 한다고 합니다. 000연구소 수녀님께서 오셔서요. 마음이 답답하여 연락드립니다. 제가 너무 민감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염려가 사실인지요. 만일 사실이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일개 신자로 본당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어찌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 주변 분들에게라도 조용히 알려주고 현명한 대처를 하도록 설명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도움말씀 부탁드립니다』

인용 글 가운데 000로 처리한 것은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프로그램 및 관련자 전체를 총괄하여 옳으니 그르니를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법이라는 견해를 말해줬다. 사용자의 의도와 영적 노선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메일 전문을 인용한 것은 글의 말미에 서려있는 건강한 사도적 열심을 독자들께 전하기 위함이다.

미국으로부터 이 자매님 보다 먼저 국제전화를 통하여 비슷한 염려를 전해온 자매님도 있었다. 지난 3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자매님은 자신이 다니는 한인공동체 신자 30여명이 「마음수련」이라는 데에 빠져서 거의 신앙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에 대한 교회 책임 기관의 태도 역시 다원적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이라는 문헌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하여 그 해악을 알려왔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사목자들 가운데에는 이 문헌을 열심히 교육한 이들도 있고, 자신만 읽고 신자들에게는 교육을 안 한 이들도 있고, 자신도 안 읽고 신자들에게 교육도 안 시킨 이들도 있다.

나아가 주교회의에서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 문제의 것들이 오히려 교회 지도층인 사제와 수녀들 그리고 교회 기관에 의해 신자들에게 교육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건강증진이라는 명목으로 기수련이 여기저기서 버젓이 본당 프로그램으로 도입되고 있다. 한국에 뉴에이지 붐을 일으킨 일등공신인 「류시화」의 시가 교회 주보와 방송매체를 통하여 홍보되고 있다고 필자에게 제보를 해온 신자들도 꽤 있었다. 명백한 뉴에이지 음악이 여전히 피정과 전례에 사용되는 일도 많다.

물론,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귀한 지면을 통하여 그 실상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4 :

 

영적 식별을 위하여 (上)

 

 

기체험후 우울증 걸려 자살 시도

정신질환에 이혼까지…
환속하는 수도자도 많아

여섯 차례에 걸쳐 신흥영성운동에 대한 글을 썼다. 계획대로라면 다음의 주제가 기다리고 있기에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순서다. 그런데 이 글과 관련하여 독자들로부터 많은 문의와 상담요청이 답지하였다. 가족 가운데 단월드, 요가, 마음수련 등에 빠져 영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는 신흥영성운동의 희생자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신흥영성운동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히 필요한 것이 「영적식별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이 영락없이 오늘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애절한 통탄으로만 들리는 것은 필자가 과민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 6)

필자는 상처입고 신음하는 양들의 소리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 더 영적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신자들이 제일 혼돈스러워하는 「기체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소위 기체험이라는 것

실제에 있어서, 한의학, 동양철학, 전통무술(태극권, 택견 등), 침술, 풍수지리 등에서 말하는 기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련문화는 우리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동안 기(氣)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거의 전무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과연 성령과 관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교회에서 우려하는 점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

한국인의 언어문화 속에서 기(氣)라는 단어는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공기」를 마시고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색」이 나쁘다, 「기」가 빠졌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차다 등 「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기란 1)활동하는 힘 2)숨쉴 때 나오는 기운이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곧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는 생명의 기본 요소가 바로 기이다.

하지만 「기」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성급한 처사이다. 동서양을 가로질러 「기」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이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기는 불변하는 이(理)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물질현상,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의미한다. 요가가 발달한 인도 쪽에서는 프라나(Prana) 곧 우주에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초심리학에서는 「사이」(PSI)라고 부른다. 최근 미국의 뉴에이지 계열에서는 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영성이 「생명의 핵이며 무한 에너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한편 일본의 사사키 시게미 박사는 기를 다중, 다층 구조로 형성된 「우주 에너지」로 정의한다. 그는 높은 층의 에너지는 작용력이 신비로워 신(神)에 가깝고 낮은 수준에서는 악마처럼 해를 끼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 파동, 영혼 등과 관련되는 천차만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기에 대한 설명이 이토록 다양한 만큼이나 기체험을 매개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이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묶어서 소개할 수 있다.

1)기수련: 기수련은 크게 「몸수련」과 「마음수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몸수련은 「기」를 건강을 위한 수련법으로 삼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기공, 단전호흡, 국선도 수련 등이 속한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기수련을 통해서 우리는 몸 안에서 기의 흐름을 막힘이 없이 원활하게 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의 축적과 활용 또한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굳이 배속시킨다면 요가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마음수련은 몸수련의 연장에서 또는 독립적으로 행해진다. 대부분 건강증진이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몸수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아완성 내지 종교적인 구도행위를 지향하는 기수련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와는 별개의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수련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불교의 선(禪), 명상, 그리고 말 그대로 「마음수련」이라는 이름의 수련을 들 수 있다.

-기치료: 기치료는 기의 운용(運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기치료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에 막혀있는 기를 소통시켜주는 요법이다. 한국에서는 민간요법을 전수받아 근래에 확산되고 있고, 서구에서는 1975년 미국의 크리거(Dolores Krieger) 교수에 의하여 창안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기체험의 피해사례

기체험이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분별하게 「기체험」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가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만 해도 다음과 같다.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 미국의 교포 신자들이 「마음수련」에 빠져 집단으로 신앙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경우.

- 요가에 빠져서 신앙을 잃은 경우.

- 가톨릭 신자였다가 요가 강사가 되어 신자들을 교회로부터 빼 내가는 경우.

이를 종합할 때, 독일인 목사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의 초월명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대로 「기체험」에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은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차한, 성경으로 세상보기, 292~293쪽 참조).

 

 

 

 

 

다원주의 시대의 가톨리시즘/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 4 :

 

 영적 식별을 위하여 (下)

 

“기수련, 가톨릭 영성에 도움 안돼”

하나같이 돈벌이에만 관심
신앙적 정서적 부작용 불러

지난 호에서 이른바 「기체험」이라는 것과 그 피해사례에 대하여 알아봤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다.

우리는 기(氣)라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기」라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물리현상일 수 있다. 곧 기는 순수한 자연적 에너지 또는 물리적 에너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확인한 바와 같이 소위 「기수련」에 빠진 신자들에게서 심각한 부작용 내지 피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플러스 알파」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러스 알파’ 부작용

「플러스 알파」란 바로 기치료 또는 기수련의 과정에 개입되는 「제3의 현상」을 말한다. 곧 기를 부리거나 기를 타거나 또는 기를 가장하여 기행세를 하는 제3의 에너지를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제3의 에너지는 성서적인 용어로 「악령」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악령들린 자와 대적하여 몰아냈던 사례가 숱하게 많이 나온다. 악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로서, 사람 안에서 사람을 황폐화하고(마태 12, 43~45) 발작을 일으키고(루가 8, 29),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2데살 2, 9)고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말하는 「플러스 알파」의 계보에는 이 악령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플러스 알파」의 개입 가능성은 기치료나 기수련을 매개해주는 사람에 크게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대체적으로 한국에 유포되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돈벌이 목적으로 상품화 된 것이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영험한 능력」이 상품경쟁력인 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통력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 과정에서 「플러스 알파」가 개입될 개연성은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 「플러스 알파」가 초래하는 결과는 신앙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나고 정서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사도 바울로는 신앙적인 부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뿐만 아니라 성서는 악령이 사람을 「비참하게」(마태 12, 45)하고 「광야」를 헤매게 하면서(루가 8, 29) 사람을 정서적으로 피폐화 시키는 「거짓말의 아비」요 「살인자」(요한 8, 44)라고 폭로한다.

지면관계로 생략할 수 밖에 없지만 신흥영성(뉴에이지)의 실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금의 진술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난다. 특히 신흥영성에서 가장 비싼 고급상품(500만원 이상)에 속하는 「채널링」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을 빌어 표현하면 「영계의 어떤 영적존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거짓된 영들」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합적 식별

필자는 이론과 체험 양면으로 「기수련」 및 「기치료」를 대부분 접해봤다. 개인적인 관심에서도 그랬고 연구의 사명감 때문에도 그랬다.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한다면, 필자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氣)를 인정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서의 기,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 그리고 자연철학(동양철학)의 기이론 등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처럼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자연적인 기에도 종류(種類)와 질(質)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의 종류 만해도 기본적으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따라서 열두 가지나 된다. 거기다가 생명의 기운인 생기(生氣)가 있는가 하면 질병의 기운인 사기(邪氣)도 있는 등, 구분하기 나름으로 천차만별인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체험」이라는 것을 하나로 싸잡아서 옳음과 그름, 선함과 악함을 가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부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그 부작용의 양상은 기를 매개하거나 기수련을 전수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답답한 노릇이지만 사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판별하는 수밖에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기(氣)는 기다. 부인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기체험은 기체험이다. 그냥 기체험이다. 기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듯이 이 기체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좋지 않은 기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란 자연과학적인 사기(邪氣)일 수도 있고, 「거짓된 영」의 교묘한 개입일 수도 있다.

성령은 성령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면 반드시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어있다. 성부를 부인하고, 성자를 배척하는 성령은 이 세상에 없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신자들을 냉담에 빠트리고, 정신질환자가 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성령」은 없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1요한 4, 2~3).

성서의 입장은 명료하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루가 20, 25 참조). 바꾸어 말해서 기는 기고 성령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결코 기수련이 가톨릭 영성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이 무슨 고리타분한 이원론(二元論)이냐며 반론을 제기할 「가톨릭신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람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애제자 베드로에게 난데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 23)하셨던 예수님은 이원론적 근본주의자였던가? 대화와 일치운동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영의 식별」 요구를 폐기하지 못한다.


 

 

참고 : 가톨릭 신문 뉴에이지 연재물들

 

http://www.catholictimes.org/search/search.cath?&page=1&keyfield=subject&key_sec_id=total&key=%B4%BA%BF%A1%C0%CC%C1%F6&condition=&key2=&start_date=&end_date=&date_check=&start_year=&start_month=&start_day=&end_year=&end_month=&end_day=&total_recor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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