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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6-7: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육(갈라 3,3; 5,16; 5,13)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02 조회수1,995 추천수0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육(갈라 3,3; 5,16)

 

 

바오로는 외적 규정에 따라 살아가려는 갈라티아인들의 성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3,3);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5,16).

 

육(Sarx)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구절은 갈라 4,23.29입니다.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언급합니다. 한 명은 하가르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창세 16,15)이며, 다른 한 명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사악(창세 21,2-3)입니다. 바오로는 첫 번째 아들이 ‘육에 따라’ 태어났고, 두 번째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아들 이사악도 사라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이 약속의 결과, 곧 ‘하느님의 섭리’로 태어났다면, 이스마엘은 후손을 보고자 하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의도, 곧 인간적인 필요성에 의해 태어났습니다(창세 16,2 참조). 이런 의미에서 육은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갈라티아인들이 할례를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선동자들의 강요로 인해 필요하다 느꼈고(6,12), 율법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규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5,4).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바오로가 성령과 육(필요성)을 대립시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갈라티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르는 삶이 병행할 수 있다 확신했던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 자체가 믿음의 삶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 모두는 주일미사를 봉헌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고, 이러한 규정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대립시킵니다. 왜냐하면 갈라티아인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늘 또 다른 규정을 찾게 합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 말입니다(5,9). 그러면서 갈라티아인들로 하여금 믿음에 따른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외적 규정으로만 살아가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동반합니다(5,16-17). 선동자들이 갈라티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면서 그들 몸에 한 일을 자랑하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6,13).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상반됨을 주장합니다. [2021년 11월 21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광주주보 빛고을 3면,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7) 갈라티아 공동체의 문제 – 육(5,13)

 

 

바오로는 육(Sarx)을 또 다른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5,13). 이 구절에서 사용된 ‘육’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13이 중요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갈라티아인들에게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게 된 이유를 ‘육의 나약함’(필자 번역)이라 말합니다(로마 6,19 참조). 갈라 5,13에서의 ‘육’도 같은 의미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 갈라티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육 때문에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율법 준수의 삶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다 보면 인간적인 나약함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바오로가 같은 단어 육(Sarx)을 하나는 인간의 나약함(5,13), 다른 하나는 필요성(5,16)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사학 기법 중 환의법(antanaclasi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자에게 특별한 효과를 내는 기법입니다. TV에서 나오는 눈 영양제 광고가 있습니다. “눈 나이 먹지 말고 000 먹자". 첫 번째 ‘먹다’는 나이 듦을, 두 번째 ‘먹다’는 입을 통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다’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영양제를 먹어야 노안(老眼)을 예방할 수 있음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도 이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같은 단어 ‘육’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인간의 나약함’과 분리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갈라티아인들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율법 준수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외적 규정에 따르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바오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인이 되어도 인간적인 나약함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따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신앙인들의 삶에 기적적인 일들을 이루십니다(3,5).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다양한 열매를 맺습니다(사랑, 기쁨, 평화 등 5,22-23). 따라서 갈라티아인들이 인간적인 나약함을 핑계로 율법 준수의 삶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5,13). 바오로는 인간의 나약함과 필요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관계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던 갈라티아인들의 확신을 지적하기 위해 같은 단어로 두 가지 다른 실재를 표현한 것입니다. [2021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광주주보 빛고을 3면, 김영남 가브리엘 신부(학다리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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