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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노아는 왜 가나안을 저주했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7,902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노아는 왜 가나안을 저주했나요?

 

 

* 성경은 노아를 “의롭고 흠 없는 사람”(6,9)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9장에서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노아의 모습을 보니,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싶습니다. 게다가 셈과 야펫이 축복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왜 손자인 가나안은 그리 심한 저주를 받아야 하나요?(30대 최 유스티나 님)

 

 

맞아요. 9장 18-27절을 읽다 보면 이 부분이 탁 걸리죠. 6장의 노아와 9장의 노아가 퍽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손자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고약한 할아버지가 된 듯싶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 사이에 무슨 큰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노아네 가족과 각종 짐승 외에는 살아남은 존재가 없었어요. 한 세계가 무너진 엄청난 재앙이었죠. 노아는 큰 정신적 충격(트라우마)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충격을 결코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 사건이 일어난 후 생각을 바꾸십니다.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당신의 자비로 덮고 약속해 주시죠.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8,21).

 

 

술 취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러면 노아는 마음에 상처를 입어 고약해졌나?ʼ 일단 그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농부로 땅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첫 조상 아담이나 카인과 다른 점은 포도밭을 가꾸게 된 것입니다. 포도는 사람에게 무척 유용하여 풍요를 주시는 하느님의 강복으로 여겼지요(미카 4,4; 하까 2,19 참조). 그래서 첫 수확 때 큰 축제(초막절)를 지냈습니다(신명 16,13-16 참조). 포도, 포도주, 축제로 이어지는 문화 현상을 보면, 노아는 각종 문화의 창시자가 된 카인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알코올 의존이나 주폭(酒暴)을 문제 삼고, 술을 악의 한 요소로 여겨 규탄하는 경향이 있지만, 구약성경은 술이 삶에 기쁨을 준다고 봅니다(시편 104,15; 코헬 10,19 참조). 동시에 하느님의 좋은 선물을 남용하여 폭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잠언 23,31-35 참조). 두렁이를 만들어 알몸을 가린 아담과 달리(3,7 참조), 술에 취한 노아는 알몸을 드러냅니다. 사건은 이때 벌어집니다. 그것을 본 아들들의 태도가 대조를 이룹니다. 함은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두 형제에게 ‘알립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그 알몸을 ‘보지 않고’ ‘덮어 드립니다.

 

알몸이 문제인가요? 예, 이스라엘에서 알몸은 부끄러운 상태이므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면 안 되었습니다(탈출 20,26; 2사무 6,20 참조). 더구나 아버지의 알몸을 보는 일은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자식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레위 18,7 참조). 게다가 함은 이를 형제들에게 알려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 놓고 모욕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 존중하는 일은 그 가정과 씨족이 존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함의 잘못은 매우 중대하고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가나안에게 저주를?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서야 그 일을 압니다. 다들 쉬쉬하면서도 함이 떠들어 대서 다 아는 분위기였는지 모릅니다. 노아의 첫 발언은 자식에 대한 저주입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라”(9,25).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그것도 세 번이나 ‘종’이 되라고요. 이에 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 부모와 자식은 공동 운명체이므로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탈출 20,5 참조). 둘째, 두 가지 전승이 섞였다고 봅니다. 노아는 ‘작은아들’(대부분 그 의미를 ‘가장 작은 아들’로 이해합니다)이 한 일을 알고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아들을 셈, 함, 야펫으로 아는 전승 외에 셈, 야펫, 가나안으로 아는 전승도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어법상 사람의 등장 순서를 나이순으로 이해하니까요. 편집할 때 “함은 가나안의 조상(아버지)”(9,18.22)이라는 구절을 삽입했으리라 생각하고요.

 

셋째, 셈과 함과 야펫을 종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간주하는 견해입니다. 그들은 홍수 이후에 퍼진 인류의 조상입니다. 셈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셈어를 쓰는 메소포타미아 주변 종족, 함은 이집트 세력권에 속한 아프리카의 여러 종족, 야펫은 지중해 주변 종족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언어나 씨족으로나 셈족에 속하는 가나안족을 함족으로 분류한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집트가 가나안을 지배하던 고대 역사(특히 기원전 1550-1200년)를 반영했거나, 이집트와 가나안이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였다는 점을 반영하여 둘을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종살이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였고,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부터 싸웠으며, 바알 신앙과 성적 행위 때문에 갈등을 빚던 종족이었으니까요.

 

넷째, 초기 왕정 시대에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던 가나안족을 복속하였습니다. 함족 전체가 아니라 가나안족과 얽힌 이런 역사적 경험을 고대로 끌어올려 그 기원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 세계에서 셈은 이스라엘, 함은 가나안과 쉽게 동일시되어 이렇게 표현했다고도 봅니다.

 

이런 여러 견해를 보더라도 명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아닌 노아의 말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의 말은 앞으로 그렇게 되라는 기원의 표현일 뿐이니까요(27,29.40 참조). 그렇더라도 아버지를 모욕한 자식더러 종이나 되라는 말은 지나칩니다. 여기서 홍수로도 씻기지 않는 죄, 인간 마음에 새겨진 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8,21)이라, 악이 여전히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죠.

 

예나 이제나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사이가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격과 삶의 틀을 만드는 가정에서 사랑과 존경,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일은 각자의 노력에 더하여 주님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노아 이야기를 되짚으니 내 가정을 다시 살피게 되지 않습니까? 노아의 가정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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