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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7 조회수5,779 추천수1
[요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친구 되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요한 복음서는 참 매력적인 책이다.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수록 더 끌리고 애정이 간다.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들로 꽉 차있다. 요한 복음 묵상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글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했다. 참된 제자, 믿다, 서로 사랑하라, 영원한 생명, 영광…? 요한 복음서 안에서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요한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 믿음의 대상은 언제나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다(14,1만 제외). 왜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조할까? 그 당시 유다인들은 한 분 하느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을 또 다른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다 아시는(2,25), 하느님과 똑같은 분임을 알려야 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로 시작하고, 토마스가 예수님을 ‘주님이며 하느님’(20,28)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파견된 아드님이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 ‘믿음’이라는 주제가 중요하지만 ‘믿음’이라는 명사는 한 번도 쓰이지 않고, ‘믿다’라는 동사만 98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말이나 머리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5,26). 요한 복음 전체를 세밀하게 읽어보면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구절들이 많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12).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8,31).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나 집에 머무른다”(8,34).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15,15).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을“내 형제”(20,17)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의 친구 되기

산책을 하며 묵상 제목을 생각하다가 발길을 멈춘 것은 이 시점이었다. ‘아! 이것으로 해야지!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제자, 친구, 형제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로구나!’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친구가 되는 길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글 제목은 “예수님의 친구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요한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읽어보니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해되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만드시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었구나!

사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과 모세만이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렸다. 간혹 이스라엘도 친구로 일컬어졌다(이사 5,1; 예레 3,4). 그러면 아브라함과 모세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여호사팟(2역대 20,7)과 예언자 이사야(이사 41,8)는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벗’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벗’이라는 말은 ‘사랑하다’(아합)에서 유래한다. 특히 히브리어 ‘아합’이라는 동사는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을 표현할 때 200번 이상 사용되었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야고 2,23).

모세도 또한 ‘하느님의 친구’로 불렸는데, 여기서 ‘친구’는 히브리어 ‘레아’가 사용되었다. 모세는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기에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린다. “모세가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9.11).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고(루카 7,34) 라자로를 사랑하셨으며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다. 신약성경에서 ‘친구’라는 표현은 필로스(φιλο?)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도 ‘사랑하다’(필레오 φιλεω)에서 파생되었다. 이렇듯이 ‘친구’, ‘벗’이라는 어원은 모두 ‘사랑하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도 친구라고 부르셨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15,15). 종과 친구의 다른 점은 서로 비밀이 없이 다 알려준다는 것과 상호 신뢰에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제자들에게 다 알려주실 정도로(1,18 참조) 신뢰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감정, 경험, 지식, 사랑을 제자들과 나누셨다. 더 나아가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최고의 우정을 드러내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제자들을 당신의 친구라는 품위로 올려준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은 그들이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매력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이 우정의 기초였다.

제자들은 ‘친구’라는 표현에 충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위대한 사람을 일컬었던 것이고, 또는 라자로를 친구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친구란 같은 또래 집단 또는 수준이 같은 사람들만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신 예수님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만드시려고 첫 번째로 하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한계 문헌(요한 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에서만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소통하고 관계하는 분임을 나타낸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말을 하시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 대화하지 않으면 친구로 남아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와 친구처럼 대화하고 관계하시려고 말씀으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이다. 말씀은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시며 친구처럼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시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께서 모세와 만남의 천막에서 친구처럼 대화하시듯,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시려고 천막을 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란다. 그것도 좋은 친구, 성실한 친구, 소중한 친구, 영혼의 친구, 헌신적인 친구, 사랑하는 친구, 친한 친구, 도움이 되는 친구, 재미있는 친구, 멋있는 친구, 내 목숨과 같은 친구를 갖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행복하다. 예수님이 이 모든 종류의 친구가 되어주시니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사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친구라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친구라 불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대신에 ‘형제’라는 단어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그리스도인들끼리 예수님의 친구라고 부르자. 예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인생 여정 길을 함께 걸어가자. 그러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에 우리 마음과 정신을 고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 사랑에 감사드리고 무릎 꿇어 경배드리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것처럼(13,23), 우리도 그분의 품에 기대어 그분 사랑에 머무르며 모든 것을 말씀드리자.


기도

말씀이신 주님,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 주는 사람”(잠언 17,17)이고, “지혜는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지혜 7,27)고 하셨습니다. 저희도 당신을 한결같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벗이 되고 당신의 친구가 되게 하소서!

* 이혜자 인덕마리아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학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요한 복음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 조수선 수산나 - 조각가. 중앙대학교 조소과, 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원이다.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했으며, 2010 솔뫼성지 야외조각초대전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블로그 blog.daum.net/artcss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글 이혜자 · 그림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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