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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맞이하다, 루카 10,38-4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01 조회수4,491 추천수1

‘만남과 관계’로 본 루카 복음 -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맞이하다

 

 

요즈음엔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우리 수녀원, 특히 과천 본원에는 언제나 밥이 넉넉하여 누구나 와서 밥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바로 준비해 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가난한 이)에 대한 준비로 쌀을 씻을 때 반드시 예수님의 몫을 더하기 때문이다.

 

선배 수녀님들로부터 전해진 이 마음이 좋아 수련기 때 주방소임을 할 때면 예수님 몫뿐만 아니라 성모님, 요셉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등등, 좋아하는 다른 성인들 몫까지 더하여, 계속해서 찬밥을 먹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루카 복음 10,38-42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분을 받아들임이며, 그분을 받아들임은 그분의 뜻,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맞이하는지, 내 삶은 어느 곳에 더 많은 중심을 두고 사는지 돌아보고 ‘좋은 몫’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수님을 맞아들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길’이라는 주제는 루카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고 계셨는데 그 도시는 그분을 단죄하고 죽음을 가져왔다.)을 가시다가 연일 계속되는 여행으로 피곤하셨기에 당신을 맞이해 줄 곳을 찾으셨다. 비록 그분이 사랑과 구원을 베푼다 해도 모든 곳이, 모든 이가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4,14-30; 9,52-56).

 

그분을 맞아들인 이는 아람어로 ‘여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타라는 여자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요한 복음(11,1)에는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마르타와 그의 동생인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 강 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베타니아에 살았다고 전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실 때부터 그분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앉으시자 그분의 발치에 가 앉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낮은 자리의 끝, 곁에 앉는다.’는 말로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마리아의 태도는 그가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임을 표현한다 할 수 있겠다. (말씀을) ‘듣고 있었다(ηκουεν).’의 동사는 미완료 능동태로, 마리아가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말씀만을 집중하여 듣고 있음을 뜻한다. 주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행복하게 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마리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지며 그의 영혼을 비추어 마리아는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마리아의 언니이며 집주인인 마르타도 행복했다. 예수님을 꼭 모시고 싶었고 이제 그분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초대된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 있는 가운데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 그 누구보다 훌륭한 식탁을 마련하고 싶어 정성을 다한다.

 

 

마르타의 요구

 

복음서 저자는 마르타가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40절)고 설명한다. ‘분주하다(περισπαω)’라는 희랍어는 ‘흩어지다, 사방에서 끌어당기다.’의 의미로, 이는 마르타의 마음이 계속해서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나타낸다.

 

시작은 기쁜 마음으로 하였지만, 일이 많아지면서 기쁨은 점차 걱정과 불안으로 옮겨간다.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리아를 보니, 동생은 꽃피듯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마르타는 자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자신의 집에 온 손님들을 보며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음식을 장만하여 주님께서 맛있게 드시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마리아가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르타는 예수님께 다가간다.

 

‘다가가다(εφιστημι)’는 ‘위에 있다.’는 뜻으로, 다스리며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의 태도를 가리킨다. 사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앉아있는 반면, 마르타는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40절)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마르타의 신뢰가 담긴 표현이면서, 동시에 동생이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주님께 그 중재를 요청하고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시는 예수님께 서운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마르타는 직접 동생에게 청할 수도 있었는데 그분의 중재를 요청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멈추게 하는 실례를 범한다. 마르타는 계속하여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라고 말함으로써 동생은 당연히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마리아는 40절에서만 세 번에 걸쳐 자신을 강조한다(제 동생이 ~, 저 혼자 ~, 저를 ~).

 

 

예수님의 대답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41절). 예수님이 마르타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신 것은, 그녀에게 내면적 주의를 불러일으키며 하느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책망과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염려하다(μεριμναω)’라는 단어는 ‘나누어지다’의 뜻을 가진 희랍어 ‘메리조(μεριζω)’에서 파생한 말로 많은 일에 마음이 분열된 상태를 가리키며, ‘걱정하다(τυρβαζω)’는 ‘문제를 야기시키다.’라는 뜻으로 마르타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생각 밖의 대답에 놀란 마르타가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부드러우나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예수님은 ‘마르타가 잘못했다.’거나 ‘마리아가 마르타보다 더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곧 예수님 은 두 여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맞이하는 한 모델을 제안하는 것이다. 많은 일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임을, 그것은 바로 마리아가 선택한 당신 말씀을 듣는 것임을 마르타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신다.

 

마리아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마음을 열었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받았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이로서 마리아의 영혼의 깊은 밭에 씨앗을 뿌리셨고, 마리아의 마음에 깊이 뿌려진 주님의 말씀을 마리아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잘 간직하여 열매를 맺을 것이다(8,11-15 참조).

 

이 이야기에서 마르타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마음이 예쁘고 아름답지만,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그의 수고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마르타 자신이 원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맞이한 마르타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임이 필요하였다.

 

그분의 뜻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 우선권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영혼을 비추고 양육하는 가운데 올바른 봉사에 투신하게 하며 그 행동에 의미와 효력을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음은 루카 10,25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조건이며 그리스도인 행동의 기본이다.

 

 

새김 - 예수님은 마르타가 준비한 식탁에 앉으셨다. 그분은 손님으로 대접을 받았지만 당신 또한 사람들을 모으고 맞이하여 하느님 말씀의 식탁을 차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맛보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마리아와 같이 당신이 차려놓은 식탁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마르타를 기다리듯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사는 우리를 기다리신다. 나 아니면 안 될 것같이 생각되는 많은 일을 주님의 섭리에 의탁하고 이제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새로운 힘과 마음으로 새로운 식탁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기 있고 기쁨이 넘치는 식탁으로!

 

기도 -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주님, 저희가 말씀이신 당신을 깨닫는 은총을 내려주시어 영원한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 맺게 하소서.

 

* 박미숙 레지나 - 성모영보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글라렛티아눔에서 수도신학을 공부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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