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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14,13-15,39 빵의 기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4 조회수4,194 추천수1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14,13-15,39 빵의 기적

 

 

빵의 기적

 

마태오는 14장에서 다른 복음서와 함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14,13-21; 마르 6,30-44; 루카 9,10-17; 요한 6,1-14)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15장에서는 마르코와 더불어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15,32-39;  마르 8,1-10)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 마태오는 그 정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많은 이들이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외딴 곳으로, 사람들이 음식을 사먹을 만한 장소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난감한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먹을 것을 찾도록 하자고 주님께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으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물론 제자들이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볼멘소리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 설명합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모습을 종말에 오시는 목자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파란 풀밭에 앉게 하시고 빵을 많게 하시어 그들을 먹이시는 이 장면은 마치 종말에 있을 메시아 도래의 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는 설명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말에 베풀어주실 잔치는 차고 넘친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구약시대에서부터 기도했던 노래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2)의 의미가 성취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울러 메시아의 평화의 때와 함께 풍성한 의미가 담긴 노래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시편 23,5)의 의미인 기쁨과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의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구약의 예언서도 종말의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목장의 정경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에제 34,14).

 

 

작지만 큰

 

‘오병이어(五餠二魚)’로 불리기도 하는 이 기적 이야기는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 지금 지명으로는 ‘답카’라는 장소에서 베푸신 것입니다.

 

공관복음(마태 14,17; 마르 6,38; 루카 9,13)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 복음은 더 자세하게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6,9)라고 말하며 빵의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 ‘오병이어’ 대신 ‘일곱 개’의 빵과 ‘조금’의 물고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이든 사천 명이든 큰 무리에게 빵이 다섯 개이든 일곱 개이든 무척이나 적은 숫자입니다. 더군다나 큰 숫자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이 작은 숫자는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숫자에 매이지 않으시고, 작지만 거기에 담겨진 ‘정성’에 감동하시나 봅니다. 주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 신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공관복음사가와 요한 복음까지도 대서특필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장미 한 송이

 

군종신부 시절, 저희 사단에는 성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신자들뿐 아니라 공소신자들까지도 성당을 갖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여기저기 성당을 다니며 모금을 했지만 자금이 턱없이 모자라서 공사가 중단될 어려움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몇 분의 자매들이 사단을 방문해서 거액의 공사비를 내놓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도움의 기원은 장미 한 송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성당 공사가 한창이던 때에 부대 관할지역인 자유의 다리 앞에서 ‘푸른 군대’의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단의 협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락을 받고 그곳에 나가 이것저것 도와드릴 것을 살피다가 성모님 상을 모시고 하는 합동미사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미사와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미사 뒤 성모님 상 앞에 많은 신자들이 모여서 성모님 상과 제대에 꽂았던 장미를 한 송이만이라도 달라고 하는데 전례 담당 수녀님은 쓸 데가 있다고 하면서 거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신자들의 간절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수녀님께 정중히 청해서 그 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달라는 대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뒤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신자들 가운데 몇 분은 한 송이의 꽃을 잊지 못했나봅니다. 그러다가 그 자매들이 우연히 군종후원회로부터 성당 건축의 어려움을 전해 듣고, 몇몇 자매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을 해서 전방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 기금 덕분으로 어려웠던 성당건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가 큰일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신자들의 청을 거절하시던 그 수녀님의 냉랭한 표정입니다. 그 덕분에 성당을 지을 수 있는 선물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한 송이 꽃의 기적을 생각하면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룬 사실을 더욱 실감 있게 해주나 봅니다.

 

 

‘레헴’의 의미

 

히브리어로 ‘레헴’은 ‘빵’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수님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선 유다와 다윗 가문에서 ‘베들레헴’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빵집’이라는 말의 뜻이 담긴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도 빵과 연결되는데, 돌아가시기 전 만찬 때에도 빵과 연결시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빵에 대해서 예수님과 다윗 가문과도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 일행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다니다가 사막에서 허기졌을 때 놉의 사제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아 주님의 집의 ‘거룩한 빵’으로 살아난 사실입니다(1사무 21,1-7 참조).

 

구약에서 빵과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멜키체덱의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왜 살렘의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지, 또 멜키체덱의 신원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멜키체덱이 사제의 모델 중의 모델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신앙의 노래 시편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110,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유다인들도 미처 알아듣지 못했던 멜키체덱의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감사의 빵

 

예수님께서는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작은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불평의 마음이 아니시라 감사의 마음을 가지신 것은 우리에게 큰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일전에 본당에서 ‘웃음치료’라는 주제를 갖고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거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일을 하면 거기에서는 ‘시너지(synergy)’가 나와서 능력도 오르고 뜻밖의 큰 결실도 맺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 용어인 성체를 ‘감사’의 의미가 있는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주님의 감사기도에서부터 많은 이들에게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기적이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새김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후에 ‘생명의 빵’에 대해 말씀하시며 광야에서의 ‘만나’를 연결시키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약과 연결된 빵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빵, 특별한 외형의 특징도 없는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빵도 사실은 서민들이 먹는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 저자는 과월절을 기념하면서 ‘고난의 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16,3 참조). 유다인들에게는 ‘레헴’이라는 ‘빵’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라함’이라는 동사의 뜻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먹다’라는 의미에서 ‘전쟁하다’, ‘싸우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삶의 복합적인 모습일 수도 있기에, 유다인들에게는 ‘빵’이 단순히 먹는 대상을 넘어 고통의 의미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빵’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꾸고 ‘수난’에서 ‘부활’로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얼마 전 중병에 걸린 신자의 문병을 갔는데, 그분 말씀이 세례를 너무 쉽게 받아서 주님께서 묵상하라고 병을 주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병중에 있다 보니 제일 후회스러운 일은 그동안 자주 짜증내며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았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쁘게 살지 못한 신앙생활에서 회개하며 살 수 있어서 병이 오히려 감사와 은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대부님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루에 삼천 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병이 낫는다는 내용이었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그 말을 하려고 하는데, 천 번에서 천오백 번은 할 수 있지만 삼천 번은 어렵다며 더욱 노력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체를 날마다 모시면서 그 의미인 ‘감사’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매일 기적을 베푸시고 감사와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8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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