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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그리스도와의 만남: 교부들의 시편기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0 조회수4,857 추천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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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만남: 교부들의 시편기도1)

 

 

예수께서는 시편을 알고 기도하셨다. 시편은 구약 가운데에서 신약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시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남아있다. 교부들은 시편을 기도하면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마리엔돈크의 대수녀원장은 교부들의 이러한 접근법이 현대에도 맞으며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과 인간,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대화인 시편은 모든 인간 경험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며, 오늘날 우리에게 기도의 학교 역할을 해 준다(AIM 편집자의 소개).

 

그 수효가 점점 줄어들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은 성경에 친숙해서 시편으로 자신의 기도를 자발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알게 된 이들은 성경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시편의 텍스트들과 싸우게 된다. 시편은 우리에게 시편을 읽으면서 듣고 묵상해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말로써 시편을 말하고 노래하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데 사용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간단히 ‘예’ 또는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각각의 시편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고 싶은 시편들도 있지만, 어떤 시편들은 우리에게 거부반응까지 일으킨다. 소위 ‘저주의 시편’들이 그런 적절한 예이다. 그 시편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형식이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러한 시편들을 기피하거나 단축된 형태로 기도했다. 시편들은 인류에게 귀중한 종교적 유산이지만 그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 우리와 매우 다른 세상의 것이다. 시편보다 현대적인 찬가나 시들이 우리의 느낌에 더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물론 시편을 지지하는 논의들이 있다. 특히 최근에 이러한 노래들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오랫동안 시편의 개별적인 요소들을 확인하는데 보다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완전한 소품으로서 시편이 지닌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있다. 게다가 이웃하는 시편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시편집 자체의 조직적 구조와 분류의 원칙도 분명해지는 한편, 사목심리학은 시편의 치유력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편은 얼핏 보기에 낯설고 이해할 수 없어서 열성적으로 시편을 기도하는 사람들도 일부 시편이나 시편의 어떤 부분은 멀리하려고 한다.

 

초기 신학자들인 교부들은 시편을 어떻게 기도했는가? 대개 주교이고 사제였던 그들은 공동체가 시편을 어떻게 이해하도록 이끌고자 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고려할 때, 단지 역사적인 관심에 의해서만 동기를 부여받을 것이 아니라 시편을 교부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유용할 것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도 교부들처럼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할 때에만 그들처럼 시편을 그리스도인 기도의 근본으로 삼을 수 있고, 거의 시편으로 이루어진 시간경을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부들은 시편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며, 시편을 기도할 때 그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을 확신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시편이 자신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 아니었던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성경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음을 심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기도를 배우기 위해서 시편을 기도하였다. 그분은 시편을 알고 적대자들과의 논쟁에서 인용하셨으며 최후 만찬 때, 파스카 식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렐(Hallel=시편 112-117편)3) 시편을 기도하셨다(참조. 마태 26,30).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을 기도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시편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상이 깊어졌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대 문화적 배경에 속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 그분은 진정으로 시편을 기도한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진정으로 시편을 기도할 수 있었다. 왜냐면 시편에서 하느님 앞에 서있는 ‘나’는 그분의 내적인 풍요함 때문에 시편이 의미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격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첫 아담과는 다른 전형적인 새 아담으로서 진실로 하느님께 순종하셨고, 그분의 온생애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이었다.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서 이해하고 신약에 기록된 그분의 고통과 죽음의 빛 안에서 읽는다면, 많은 시편들과 시편의 구절들의 이해에 완전히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 시편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분, 시편이 언급하는 그분을 보여준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확신이었다. 우리는 시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또 다른 시편들과 구절들은 직접적인 기도는 아니지만 이야기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구약의 책들 중에서 시편이 신약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집중적으로 고찰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시편들이 아름답거나 교훈적이거나 영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언으로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야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다. 우리는 시편의 이러한 예언적 이해를 신약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참조. 히브 1,5-13), 강생(참조. 히브 10,5-7), 잃은 죄인들(참조. 로마 3,10-18), 유다의 배신(참조. 사도 1,20), 로마인과 유대인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신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박해(참조. 사도 4,25 이하), 예수의 부활과 영광(참조. 사도 2,25-28.34 이하). 신약 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명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살게 되자마자 시편은 더 중요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특성에서부터 시편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전형적인 인물은 다윗 왕도 아니고, 새로운 메시아적인 다윗이라는 인물도 아니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언으로서의 시편

 

교회 교부들은 신약에서 발견되는 시편들의 이해를 이어받아, 이런 점을 배경으로 시편 전체를 묵상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거의 모든 시편이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 시편은 성부께 말씀하시는 아들, 즉 하느님께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Against Praxeas, 11,7]. 그래서 교부들은 신약의 중요한 신비들은 모두 시편에 예고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탄생 예고(“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시편 44,11), 그리스도의 고난(“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21,2), 그분의 부활(“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 시편 15,10), 승천(“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신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신다”, 시편 46,6),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시편 109,1)[참조. 아타나시우스,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 5-8.26]. 3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나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깨어남은 주님께서 나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니(시편 3,6).’ 다윗은 죽은 후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었고 - 다른 곳에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듯이 -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다윗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부활 때 일으켜지셨기 때문에 ‘잠’은 죽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도 이야기 한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1 이하). 유대인의 왕, 헤로데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대리자, 폰티우스 빌라도가 함께 그분을 십자가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이다”[이레네우스, Presentation of Apostolic Preaching, 73.f ].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예언적 시편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는 방금 우리가 노래한 단어들을 단순히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57,1]. 그래서 이러한 시편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하느님 자신에 의해 감명 받도록 자신을 열어놓고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들음에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예수와 그분의 운명에 관하여 알 때 시편을 더욱 새롭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시편을 잘 알 때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23,7-10은 이러한 과정의 좋은 예이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다.” 2세기에 유스티누스는 이 단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는 예언자의 말을 히즈키야, 혹은 다른 왕들, 예를 들면 솔로몬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들은 히즈키야나 소위 왕으로 불리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이사야, 다윗과 모든 성경이 선포했듯이 영광과 영예 없이 나타나신 우리의 그리스도만을 언급한다(참조. 이사 53,2 이하). 그분은 시편과 성경이 드러냈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켜지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이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권세들 위에 계신 주님이시다.”

 

 

시편에서 화자(話者)는 누구인가?

 

시편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 시편으로 기도하였던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질문일 것이다. 사실, 현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그 대답은 분명하다: 시편은 그들의 야훼,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이다. ‘야훼’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시편에 598회나 나온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해준다.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야훼’라는 이름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주님’(Kyrios)으로 번역하였다(라틴어로 Dominus). 신약에서 ‘주님’이라는 호칭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호칭으로뿐만 아니라 신적인 영예의 표현으로써 그리스도께 부여된 호칭이기도 하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 그래서 초대 교회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번역된 시편을 읽을 때, ‘하느님’이라는 호칭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 친숙한 호칭이었던 ‘주님’을 접하게 되었다. 이 점은 시편을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고 이해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때로는 시편들이 성부께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로서 읽혀졌는가 하면 또 어떤 시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예수에 관한 예언으로 읽혀졌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시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기도로 읽혀지기도 했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부들은 시편의 모든 단어들에 이런 질문을 던지며 탐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누구에게 말하고 하는가?” 시편은 누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시편의 화자가 많은 경우에 하나의 시편 안에서도 여러 번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편은 한 사람 개인이 기도하는 독백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하느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대화이다. 시편은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시편에서 말하는 이와 그 말을 듣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오해는 시편 전체를 잘못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시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 조건은 이 시편에서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능력이다”[힐라리우스, Treatise on the Psalms, 1,1 ].

 

그래서, 시편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모든 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시편을 기도하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 그분이 성부께 말씀하신다.

 

이것의 한 예는 시편 21편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단어들이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교부들은 이 시편의 뒷부분을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부께 드리는 말씀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시편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시편을 기도하고 들을 때, 내재하시는 삼위일체 사이의 대화를 목격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시편을 기도하면서, 그리스도께 말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명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분의 부활을 요청한다고 한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부활이 그분의 부활에 의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저의 하느님”(시편 3,8)[참조.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3,6f].

 

우리는 시편을 기도하면서, 성부께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목적이다. 그분은 우리가 성부께 구하는 분이다.

 

시편 84,8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라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명한다.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내소서.  그분 안에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내소서”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느님께서는 진실로 그분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지만, 우리는 항상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내소서”라고 말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항상 그분께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하는 것과 같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말한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의 빵이겠는가[참조.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84,9].

 

 

비탄과 저주의 시편

 

많은 시편들을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기도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만약 그것들이 직접적인 기도 형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 보는 것도 효과적이다. 그러나 시편을 좀 더 잘 아는 이들은 모든 시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많은 비탄과 저주의 시편들은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말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분명히 인간적인 죄로 가득하거나 기도하는 이가 자신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자를 분명히 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죄 없고 당신 위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분의 입에서 자기 죄의 고백과 때로는 적에 대한 가학적인 저주가 나온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많은 비탄의 시편들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문장을 만난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주소서(시편 50,11).” 시편에 대한 교부 주석의 개론으로 간주되는 ‘시편에 대한 주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특별히 이러한 시편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견해를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시편 31편의 서언에서 그는 말하기를: “시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특히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분께 전혀 어울리지 않게 여겨지는 몇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어떤 말들은 동정녀에게서 나신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조차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지체 안에도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그런 것들을 말씀하신다”[참조. 시편에 관하여, 2; 설교, 1,4]. 히포(Hippo)의 이 위대한 주교가 여기서 지적하는 해결책은 그리스도론적 반성, 즉 처음에는 놀랍지만 결코 불필요하지 않은 ‘우리가 시편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놓여 있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살았고, 사형에 처해져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이신가? 그분은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주님이신가? 또는 당신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신가?

 

이 모든 해답들은 옳은 것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편 안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컬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반드시 있어야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totus Christus’(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은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며, 우리는 시편 안에서 totus Christus, 그분이 기도하시는 것을 듣는다. 비탄의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죄와 참회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더욱이 지체들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인정하시고, 용서를 청하신다.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완전히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목표는 아직 모든 지체들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결핍, 병, 실패, 심각한 잘못이 존재한다. 이 모든 사실들이 시편에 들어있고, 그리스도는 성부께로 그것들을 가져가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전체의 그리스도는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시편에서 우리는 머리이신 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지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분은 우리와 분리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따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보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다.’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말하기 때문에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56,1].

 

이 점은 시편 3편에서 매우 분명해진다. 이 시편은 신뢰를 표현하면서 끝맺는 개인적인 비탄의 시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가지 단계로 이 시편을 설명한다. 처음에는 지상의 그리스도께, 그 다음은 전체로서의 교회에, 마지막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이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진 전체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 한 편으로 이 지체들은 한 몸을 이룬다. 다른 한 편으로 이 한 몸은 각자 하느님께로 향하는 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교부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6절이 전체 시편의 중심이 되는 행이다: “나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깨어남은 주님께서 나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니…….” 이것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면, 이는 분명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도 죽음으로부터 일어났다. 세례 때, 교회는 그 자체로 죽음인 죄의 어둠을 떠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빛을 밝혀주신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세례를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이 시편을 기도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7절을 짧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거슬러 둘러선 수많은 무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복음에 묘사된 대로 거대한 군중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 받는 분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할 때: “어디서나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려 하면서 나를 공격하는 이방인들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흘린 순교자들의 피라는 기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불타오르는데 어떻게 그들을 두려워할 수 있으랴?” 그리고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에게 적용할 때: “일반적으로 교회가 견뎌야만 했고 아직도 견뎌야만 하는 모든 것은 별개의 문제로 하고도 모든 개인들은 유혹에 시달린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3.6과 9 이하].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언어로서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와 교부들은 훨씬 더 어려운 저주-시편들은 어떻게 했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136의 8절 이하에 나오는 끔직한 문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질문한다. “바빌론의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악한 열정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격정과 욕구에 대항해서 싸워야만 한다. 격정이 일어나면, 악습이 당신을 정복하고 당신의 지배자가 되기 전 아직 초기에 뿌리를 뽑아라.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을 두려워한다면, 뿌리를 뽑았다 하더라도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바위 위에 메어쳐라. ‘그 바위는 그리스도이시다’”(1코린 10,4)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136,21 - 참조. 베네딕도 수도규칙, 서언 28절, 4장 50절은 이러한 해석을 전제로 한다].

 

시편의 저주는 하느님께서 악을 파괴하시리라는 희망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즉 그분께서 주의 기도에서 드리는 마지막 간청을 이루어주시리라는 것이다: “악에서 구하소서.” 그래서 저주는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인 한해서만 그러하다. 죄인으로서의 죄인은 참된 인간의 길을 살기 위하여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그가 회개를 경험할 때 일어난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행한 사람을 멸절시킴으로써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이 문맥 안에서, 참조. 히에로니무스, 시편에 대한 Treatise 59, 시편 82]. 동시에 교부들은 악이 다른 이들 안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할 때, 우리가 죄인인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이 저주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파괴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이 부르짖음은 실존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관련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정화의 불속에서 변화시키셔서 그분 아들의 몸과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라는 요청이다.

 

 

실존적 해석

 

뿐만 아니라 이 점은 교부들의 시편 해석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을 불러일으킨다. 교부들은 시편이 직접 이야기하는 대상은 수백 년 전에 이 시편을 기도한 개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상은 오늘날의 독자와 청자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왕좌에 앉아계신다. 미래에 관하여 예견된 것이 이제 이루어지고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왕좌에 앉아계신다. 그분의 거룩한 왕좌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것을 하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에서 일어나셨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우리는 그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분의 왕좌는 하늘에 있는가? 당신도 역시 그분의 왕좌가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이 왕좌가 될 수 없다고 믿지 말라. 당신의 마음에 자리를 마련하면 그분이 오셔서 그곳을 당신의 왕좌로 만들 것이다. 확실히, 그분은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이시다. 성경은 이 지혜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의로운 이들의 영혼이 지혜의 왕좌이다. 의인들의 영혼이 지혜의 왕좌라면, 당신의 영혼도 의로워져야하고 당신은 지혜의 왕좌가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에 관하여, 46,10].

 

시편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구원의 역사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거울 속에서와 같이 알게 된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언어가 인간 삶의 전부, 근본적인 영적 인식, 욕구, 통찰을 포함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 안에서 그 이상은 발견할 수 없다”[아타나시우스,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 30]. 우리는 이 말을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여야한다. 시편은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말한다. 이런 이유로 거기에 인간에 관하여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인지 말해 주는 동시에 이 사실을 표현하고 그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가는데 필요한 말들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말로써 기도할 필요를 경험해왔다. 그러나 자주 적당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려고 할 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자주 어려움을 느끼고 실망스러움을 경험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말을 잘 하지만 하느님께 말을 하려고 할 때는 적합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편은 기도의 학교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고 말할 때 받게 되는 선물이다.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배우는 어린이에 비유될 수 있다. 어린이는 어머니에게 말하기 위해서 필요한 바로 그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을 표현하고 하느님에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말들을 시편에서 얻는다.

 

성 아타나시우스도 이 점에 관하여 말한다: “책들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권고한다. 여기 시편에서 우리는 그러한 회개의 모델과 회개할 때 해야 하는 말의 모델을 발견한다[……].” 더욱이, 시편은 우리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명한다(1테살 5,18). 여기서 다시 시편은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고 싶을 때 하는 말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시편은 우리가 유혹을 피하고자 할 때, 박해받을 때, 억압에서 풀려났을 때 하느님께 어떻게 말해야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시편을 읽는 사람은 성경의 다른 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편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시편의 언어는 그의 삶에 흡수되어 자신의 언어가 되고 가장 깊은 자아와 느낌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시편을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편에서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이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난다. 시편은 하느님의 언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언어이다. 이 언어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변모된다. 그의 사고방식이 변모되어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1코린 2,16).

 

시편을 기도하는 사람은 진실로 시편을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아타나스우스가 당연하게 여기듯이, 시편을 지은 저자들은 천상 교회에 속한 이들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시편을 통해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누구든 시편을 임의의 기도로 바꾸는 것을 분명하게 경고한다: “아무도 좀 더 적절해 보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시편을 향상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시편을 고쳐서 말하거나, 시편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시편은 단순하게 씌어진 그대로, 받은 그대로 읽고 노래해야 한다. 시편을 우리에게 전해준 이들도 그들 자신의 언어를 알아보고 우리와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위로해주신 말씀들을 성령께서도 들으셔야 할 것이다. 성인들의 삶이 다른 이들보다 거룩한 만큼, 그들의 언어는 우리가 보태는 말보다 더 효과적이고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시편을 성경의 요약이며, 축소된 성경으로 이해했다. 시편을 아는 사람, 즉 시편을 따로 외울 줄 아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초기 수도 생활 전통 안에서는 수도승이 시편 전체를 외워서 암송하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여겼다. 이 점과 관련하여, 성 아타나시우스는 말하기를 “시편은 마치 정원처럼, 성경의 다른 책들이 내는 열매를 간직하고 그것들을 노래로 바꾼다”고 했다[아타나시우스,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2]. 시편을 더 오래 기도할수록, 시편은 더욱 그리스도의 기도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게 되고, 그 기도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시인인 Wilhelm Bruners가 생생하게 말한 것은 사실이다.

 

다 리

 

아침에

시편이 만들어놓은 다리를 건너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자신을 맴돌지 않는다.

대신 내 일상의 두려움 속으로

오래된 치유의 언어들을 들이마신다.

그러면 나는 희망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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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IM Bulletin 90. 본래 원고는 독어로 되어 있으나 영어 번역본에서 우리말로 번역했다.

2) Christiana Reemts, OSB. 독일 Mariendonk 수녀원 아빠티사.

3) 시편 번호는 라틴역 내지 로마 성무일도서를 따른다.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크리스티아나 레엠츠2) · 김유정 알마 옮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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